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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인 20인 중의 한사람. 명필, 문장가. 찬성사 옥란의 자이며 조선초 대유 변계량의 친형. 이원계(태조 이성계의 이복 형)의 사위였으니 정몽주의 문하인으로 신흥세력인 처가보다 스승을 더 따랐다. 이방원 등이 정몽주를 해하려는 사실을 사전에 탐지하고 정몽주가 선죽교에 가는 것을 말렸으나 정몽주가 듣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신흥세력인 이성계의 편으로 넘어갔으나 정몽주와 함께 끝까지 고려왕실을 지키는 쪽에 서 있었다. 수차례 처족의 비밀스런 움직임을 고려왕가에 알려 고려를 보호하다가 이성계 일파의 미움을 샀다. 조선 건국후 처 삼촌 이성계의 회유에 넘어가 다시 조선에도 출사하였다. 조선초기 이방원 등이 사병을 양성하는 것이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고 주장하며 건의하였으나 채택되지 않고, 이 때문에 이방원 일파에게 극도의 미움을 샀다. 태조가 명나라에 굴욕 외교를 펼치자 명나라 토벌을 주장했는데, 이로인해 죄인이 되어 명나라로 압송되게 되었다. 압송과정에서 명나라 황제가 바뀌면서 사면령을 받아 살아났다. 제 1차 왕자의 난 때 이성계 일파라 하여, 이방원의 혁명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하였다. 이방원은 변중량이 경고한대로 사병을 이용하여 태조를 축출한 것이다. 고려왕실과 정몽주에 대한 의리, 원나라에 대한 의리, 이성계에 대한 의리 등 세번이나 신흥세력보다는 옛 인연과의 의리를 더 중시하는 대에 목숨을 건 인물이었다. 1868년 (고종 5년) 대원군은 외세에 항거하고 국가와 왕실을 보호하려 한 변중량의 공을 기리어 신원하고 이조판서를 추증했다. 아우 변계량이 당시 이름도 없는 한 지역을 형의 이름을 따서 중량포라 불렀는데, 그 지역이 바로 오늘날의 중랑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