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경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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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석경당'''(石敬瑭, 892년 ~ 942년)은 오대십국시대 후진(後晉)의 초대 황제(재위 : 936년 ~ 942년)이다. 출신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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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원이 즉위 한 후, 석경당은 보의(保義), 선무(宣武), 하동(河東) 지방의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이종가]](李從珂)가 [[이종후]]를 폐위하여 황제로 즉위 하면서, 석경당의 세력을 경계하게 되어, 태평절도사(天平節度使)로 좌천 되었다.
그 후, 국내의 반란에 틈을 타서 거란족을[[거란족]]을 이용하여 황제를 자칭 한 후에, 거란족의 군사를 이용해 936년에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後晉)을 건국했다.
즉위 후에 연운 16주를[[연운십육주]]를 요나라에 바치고 매년 30만필의 비단을 조공하는 조약을 맺어, 석경당보다 10세 연하의 [[야율덕광]]을 「아버지 황제」라고 칭하고, 스스로를 「아들 황제」라고 칭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방식에 불만을 가진 [[안중영]](安重榮)과 [[경연광]](景延廣)등의 세력과 굴욕적이지만 현 상태를 유지하여 그 동안 국력을 안정 시켜 이어가자는 상유한(桑維翰)의 세력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후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인 [[유지원]](劉知遠)이 토욕혼(吐谷渾)에게 투항을 하였기 때문에, 자주 거란으로부터 문책을 받아 [[942년]]에 분사하였다.
후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인 [[유지원 (후한)|유지원]](劉知遠)이 토욕혼(吐谷渾)에게 투항을 하였기 때문에, 자주 거란으로부터 문책을 받아 [[942년]]에 분사하였다.
 
== 후세의 평가 ==
석경당은 황제의 지위를 얻기 위해 연운 16주를 거란(요나라)에 영토를 주었고, 한층 더 요나라의 종속한 것부터, 후세에 특히 민족주의가 높아진 근대에 매국노의 전형으로 삼아 남송의 [[진회]](秦檜)등과 함께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