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경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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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원이 즉위 한 후, 석경당은 보의(保義), 선무(宣武), 하동(河東) 지방의 절도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이종가]](李從珂)가 [[이종후]]를 폐위하여 황제로 즉위 하면서, 석경당의 세력을 경계하게 되어, 태평절도사(天平節度使)로 좌천 되었다.
그 후, 국내의 반란에 틈을 타서
즉위 후에
후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인 [[유지원]](劉知遠)이 토욕혼(吐谷渾)에게 투항을 하였기 때문에, 자주 거란으로부터 문책을 받아 [[942년]]에 분사하였다.▼
▲후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인 [[유지원 (후한)|유지원]](劉知遠)이 토욕혼(吐谷渾)에게 투항을 하였기 때문에, 자주 거란으로부터 문책을 받아 [[942년]]에 분사하였다.
== 후세의 평가 ==
석경당은 황제의 지위를 얻기 위해 연운 16주를 거란(요나라)에 영토를 주었고, 한층 더 요나라의 종속한 것부터, 후세에 특히 민족주의가 높아진 근대에 매국노의 전형으로 삼아 남송의 [[진회]](秦檜)등과 함께 비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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