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북송저지공작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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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획 발각 ==
[[File파일:Map of Japan with highlight on 15 Niigata prefecture.svg|thumb|[[니가타 현]]]]
* 1959년 12월 4일, [[일본 경시청|경시청]] 외사과는 니가타 현 [[시바타 시]]내의 바(Bar)에서 밀담을 나누고 있던 공작원 2명에게 임의 동행을 요구하여, 시바타 경찰서에서 그들을 취조했다. 공작원의 가방 안에서는 뇌관을 장전하여 네 개를 묶은 [[다이너마이트]] 세 다발(총 12개)이 발견되어, 폭발물 단속 벌칙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또 [[니가타 역]]에서는 공작원이 역에 맡겨놓은 위스키 상자에서, 1리터 용량의 가솔린통 네개가 발견되어, 공작원들이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를 폭파하려 했던 것이 밝혀졌다.<ref>김찬정, 234 ~ 235쪽에서.</ref><ref>요미우리 신문 1959년 12월 5일자에서. </ref><ref>아사히 신문 1959년 12월 5일자 석간에서.</ref><ref>마이니치 신문 1959년 12월 5일자에서.</ref> 또 이 공작 사건은 한국 영사관의 김영환 삼등 서기관과 내일 중이었던 한국 특무 기관의 간부가 지휘한 것으로 밝혀졌다.<ref name="kim235"/> 이 때 체포된 공작원 중 한 명은 일본 국적을 취득한 재일 한국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재일 의용병으로서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 치안국 소속의 재일 조선인이었다.<ref name="kim235"/><ref name=kokkai19591208/> 일본 국적을 취득했던 재일 한국인은 사건 전에는 신문 기자를 사칭하여 [[일본 적십자]] 본부 주변에 잠입하고 있었다가, 일본 적십자사로부터 출입을 금지당했었다.<ref name=kokkai19591208/> 사건 발각 후 경찰은 잇달아 대한민국의 공작원을 적발했다. 이 폭파 미수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어, 일본인들이 대한민국 정부나 재일 대한민국 거류민단에 대하여 경직된 시각을 갖게 만들었다.<ref>김찬정, 237쪽 ~ 239쪽에서.</ref>
 
== 사건 후 ==
=== 중의원 법무위원회 ===
[[File파일:Japanese diet outside.jpg|thumb|[[일본 국회]]]]
12월 8일 [[일본 중의원]] 법무위원회에서 [[일본사회당]]의 [[이노마타 고조]] 대의사는, 사건 발생 전에 니가타 적십자 센터 폭파 계획과 사건 실행범인 공작원 아무개가 니가타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송환 촉진 단체로부터 이미 받았다고 밝혔다.<ref name=kokkai19591208>{{cite web
| url = http://kokkai.ndl.go.jp/SENTAKU/syugiin/033/0488/03312080488006a.html
| date = 1959-12-08
| accessdate = 2010-02-05
}}</ref> 또 이노마타는 [[안두희]], [[장두권]], [[한구]], [[유일희]], [[이주호]] 등 한국군의 주요 인사가 일본에 잠입하고 있었으며, 한국 영사관의 김영환이 준비한 [[한국은행]] 수표 800만엔이 한국인을 거쳐서 12월 4일 오후 2시 반 한국 요리점에서 안두희 일행에게 전달되었다는 정보에 대해 발언했다.<ref name=kokkai19591208/> 그 때, [[김구]]를 암살한 장본인 안두희가 "강두희"(姜斗熙)라는 가명으로 [[다치카와 미군 묘지]]를 경유해 잠입했다고 주장했다.<ref name=kokkai19591208/> 또, 한국의 공작 활동은 세개로 나뉘어져개로 나뉘어 있었는데 첫번째는 니가타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계획, 두번째는 운송 열차의 폭파, 세번째는 앞의 두 계획이 실패했을 때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간부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의 송환 책임자를 테러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 이노마타는 "도대체 왜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재일)조선인들을 일본 정부가 돌려보내 주겠다는데 그들이 반대하고 있는 것인가?"라며 의문을 제기했다.<ref name=kokkai19591208/>
 
=== 대한민국 ===
[[File파일:Seoul National Cemetery 26th Sanctuary.JPG|thumb|[[국립서울현충원]]]]
* 1959년 12월 8일, 주일 대표부의 [[유춘하]] 대사가 [[신아통신]]의 인터뷰에서, 대한민국과 사건과의 관계를 부정했다.<ref>김찬정, 239쪽에서.</ref><ref>아사히 신문 1959년 12월 5일 석간에서. </ref>
* 2009년 5월 19일, 공작 활동 중 사망한 공작원이 "재일동포 북송국가 임무수행 순직자"로서 전몰자로 인정받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ref>TBS, 2009년 9월 26일 방송에서.</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