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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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젊었을 때 [[정현 (후한)|정현]](鄭玄)과 함께 [[마융]](馬融)에게서 몇 년 동안 학문을 배웠다. 마융이 주변에
[[167년]] [[후한 환제|후한 환제]](桓帝)가 죽고 [[후한 영제|영제]](靈帝)가 즉위하였다. 환제의 황후 두씨의 아버지였던 두무(竇武)는 영제를 옹립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기에 문희후(聞喜侯)가 되었는데, 이때 노식은 두무에게 자만하지 말고 상을 사양할 것을 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5년]] 소수민족의 반발이 일어나자 조정으로부터 구강(九江) 태수에 임명되어 사태를 잘 수습했으며, 이후 여강(廬江)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자 여강태수를 지냈다.
[[178년]] 10월
[[184년]] [[장각]](張角)의 지휘하에 황건적들이 봉기하자, 조정으로부터 북중랑장(北中郞將)에 임명되어 진압에 나섰다. 노식은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 본진을 상대로 거듭 승리하여 광종(廣宗)에서 이들을 포위했다.
이때 조정에서 보낸 [[환관]]인 소황문(小黄門) 좌풍(左豊)이 노식의 군영을
[[광희 (후한)|광희]](光熹) 원년([[189년]]), 대장군 [[하진]](何進)이 [[동탁]](董卓)을 끌어들여 [[십상시]]를 제거하려 하자 노식은 정태(鄭泰)와 더불어 이를 반대했으나 하진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결국 하진이 십상시에게 암살당하자 그 부하들은 일제히 궁궐을 공격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장양 (후한)|장양]](張讓)이 하태후에게 하진의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고하고 태후와 황제, 진류왕을 데리고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노식이 창을 쥔 채 태후를 이끌고 달아나던 [[단규]](段珪)를 거듭 노려보자, 단규는 마지못해 태후를 놔두고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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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장구(尙書章句)》
*《삼례해고(三禮解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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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식의 친족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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