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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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분쟁
|전체
|그림
|설명=한국 전쟁 중의 사진들
|날짜=[[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휴전)
|장소=[[한반도]]
|결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br /> 본격적인 냉전체제 돌입 <br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앙집권 강화
|교전국1=[[파일:Flag of the United Nations.svg|22x20px]] '''[[국제 연합]]:'''
{{KOR}}<ref>[[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이 [[1950년]] [[7월 14일]] 미군에 이양됨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 역시 국제연합군 산하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여하였음. 따라서 대한민국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국제연합군 소속으로 분류함. </ref><br />
{{
{{AUS}}<br />
{{GB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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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지원국'''<br />
{{JPN}}<br/>
|교전국2=
{{PRK}}<br />
{{CH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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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그림|불가리아|1946}}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br />
[[파일:Flag of Romania (1965-1989).svg|21px]]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병력1
UN군 사령부: <ref> 주의: 출처에 따라 수치는 다를 수 있음. </ref>
{{ROK}} 590,911 명 <br />
{{USA}} 480,000 명<br />
{{
{{국기나라|CAN|1921}} 2만 5687 명<br />
{{NZL}} 3794 명<br />
{{GBR}} 5만 6000 명<br />
{{PHL}} 7420 명<br />
{{TUR}} 1만 4936 명<br />
{{NLD}} 3522 명<br />
{{LUX}} 44 명<br />
{{COL}} 1,068 명<br />
{{BEL}} 900 명<br />
[[파일:Flag of Ethiopia (1897).svg|22x20px]] [[에티오피아 제국|에티오피아]] 1,271 명<br />
{{FRA}} 1,119 명<br />
{{국기나라|그리스|1828}} 1,263 명<br />
[[파일:Flag of South Africa 1928-1994.svg|22x20px]] [[남아프리카 연방]] 826 명<br />
{{THA}} 1,294 명<br />
'''총: 1,198,462 명'''
|병력2
공산군:
{{PRK}} 260,000 명<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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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R}} 26,000 명<br />
'''총: 1,066,000 명'''
|지휘관1=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승만]]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정일권]]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백선엽]]<br /> {{국기그림|대한민국}} [[김홍일]]<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형근]]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채병덕]]<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응준 (군인)|이응준]] <br /> {{국기그림|USA}} [[해리 S. 트루먼]]<br /> {{국기그림|미국}} [[더글러스 맥아더]]<br />{{국기그림|미국}} [[매슈 리지웨이]]<br />{{국기그림|미국}} [[마크 웨인 클라크]]<br />{{국기그림|미국}} [[드와이트 D.
|지휘관2= {{국기그림|북한}} [[김일성]] <br /> {{국기그림|북한}} [[박헌영]] <br /> {{국기그림|북한}} [[최용건]]<br />{{국기그림|북한}} [[김책]]<br /> {{국기그림|북한}} [[김무정]]<br /> {{국기그림|북한}} [[김광협]]<br /> {{국기그림|북한}} [[전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전우]]<br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br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펑더화이]]<br />{{국기그림|소비에트 연방}} [[이오시프 스탈린]]<br />{{국기그림|소비에트 연방}} [[게오르기 말렌코프]]
|사상자1
{{국기그림|대한민국}}
<br />
{{국기그림|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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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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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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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그림|
'''총계:'''
|사상자2=
{{국기그림|북한}}
<br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br />
{{국기그림|소비에트 연방}}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
'''한국 전쟁'''(韓國戰爭)<ref>{{출처|[[대한민국]]에서는 '''6·25 사변'''(六二五事變)을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다.}} 또는 '''6.25 사변''', '''6·25 동란''', '''6·25 전쟁''',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북한]]의 명칭)은 하지만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표기법을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사전들은 '''한국 전쟁'''이라는 말 대신 '''6·25 전쟁'''이라고 규정한다.</ref>은 [[1950년]] [[6월 25일]] 이후 발생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전쟁 또는 내전이다. [[대한민국]]측 견해에 의하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이남의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라 한다. [[1953년]] [[7월 27일]]의 정전 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지만, 휴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치른 [[냉전]]시절의 양대 전쟁의 하나로서,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3만여 명이 사망했다. 전쟁의 성격을 두고 내전인가 외세가 주가 된 전쟁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한국 전쟁 중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의 양민 학살 사건, 정치인 납북 사건, 협력자 사살과 인민재판, [[한국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 개요 ==
[[1950년]] [[6월 25일]]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 결과로 남북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었다.
=== 다양한 호칭 ===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사변'''(六二五事變)(정부의 호칭)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ref>[http://stdweb2.korean.go.kr/main.jsp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한국전쟁'으로 검색</ref>, 그 밖에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초기부터 80년대까지는 6.25사변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80년대 민주화투쟁시국의 진보적 지식계층에서 외국(특히 미국)의 문헌에 등장하는 "Korean War"를 타국의 사건을 다루듯 직역해서 "한국 전쟁"으로 번역보급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 각종 학계와 언론, 출판계에서까지 따라 사용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한국 전쟁'이라는 호칭은 이 전쟁이 마치 제3의 국가에서 벌어진 듯 보이게 하는 점이 문제라고 주장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6·25전쟁'이냐 '한국전쟁'이냐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6/21/20100621001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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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다른 국가들은 '''조선 전쟁'''({{ja-y|朝鮮戦争|ちょうせんせんそう}}, [[일본]]), '''항미원조전쟁'''({{zh-t|t=抗美援朝戰爭}}, [[중화인민공화국]]), '''한국/조선 전쟁'''(Korean War
== 배경 ==
=== 남북분단 ===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국기|일본}}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거절하자 {{국기|미국}}은 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을 두 개 떨어뜨렸고 {{국기|소련}}군은 북한지역까지 진격했다. <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articleno=15609402&blogid=03uYb&categoryId=0®dt=20100624211236#ajax_history_home 북한 남침 준비] </ref> 이로써 [[한반도]]는 8월 15일에 일본 식민지에서는 벗어났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38선]]을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군정, 남쪽에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분할점령을 한국전쟁의 배경으로 보는 것 즉, [[공산국가]]인 [[소비에트 연방]]과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여 [[이념]]대결을 벌인 전쟁이 한국전쟁이라는 곧 한국전쟁을 [[대리전쟁]]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설명이 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할점령되었으나, [[오스트리아]]는 [[1955년]] 분할점령을 끝내고 [[영세중립국]]으로서 [[통일]]국가가 되었고,<ref>《위클리 경향》,역사에서 미래를 묻다-한국전쟁60주년, 박태균 서울대학교 교수, 2010년 7월 6일자 p.41</ref> 독일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되었지만 [[동방정책]]이라 불리는 외교적 노력으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대화와 교류를 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사실 연합국도 [[일본]]을 분할 통치할 계획은 있었으나 일본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 한국전쟁 직전 남북 군사상황 ===
==== 점령군 철수 ====
남쪽의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이 [[1948년]]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움과 동시에 남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남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ref>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한국학술정보, 2008년</ref>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비밀 협상을 하여 [[소련]]의 무기들이 [[북한]] 영토로 입수되었고 [[
====
그렇기 때문에
==== 기타 ====
이 밖에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소련]]의 북한원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38선]] 분쟁도 한국전쟁의 배경이다.<ref>《[[위클리 경향]]》, 역사에서 미래를 묻다-한국전쟁60주년, 박태균 [[서울대학교]] [[교수]], [[2010년]] [[7월 6일]]자 p.41</ref>
북쪽의 김일성은 [[1949년]] 무렵부터 수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전쟁을 치를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더러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남한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북한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그를 설득하였고 스탈린 자신도 일부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남침계획을 세우면서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남한내 [[좌파]]가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이는 [[1949년]] [[남한로동당]] 등의 남한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남한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ref>《위클리 경향》, 역사에서 미래를 묻다-한국전쟁60주년, 박태균 서울대학교 교수, 2010년 7월 6일자 p.42</ref>
[[조선노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자본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북한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북한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던 [[김일성]] 주석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으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남한 내의 정치적 다툼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파]] 정당과,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왔고 양자를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듯 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상일 뿐이었으나, 북한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일본 공산당 =====
[[1950년]] [[5월]] [[코민포름]]이 [[일본공산당]]의 온건노선을 비판하자, 일본공산당 도구사 서기장은 노동절을 기하여 일본공산당은 1950년 테제인 다가오는 혁명에 있어서 일본공산당의 기본임무를 채택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전투적 공산당으로 변모하였다. 일본공산당은 5월 30일 궁성앞 인민광장에서 2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한 "공산당 방위, 평화옹호, 요구관철, 조선통일전선 인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 [[조총련]]의 행동대, 학생, 조직노조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집회 후 도심지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여 미군 헌병과 충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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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군함|함대]]습격도 포함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 반도에서 [[강원도]]의 [[양양군|양양]]까지 걸쳐져 있어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 반도, [[송악산 5·4 전투|개성]], [[의정부시|의정부]], [[춘천시|춘천]] 그리고 [[강릉시|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에 [[조선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전국을 통틀어 비행기는 고작 15대였으며 그것도 분계선이 아닌 호남지방에 있었다. 또한 함대는 1척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군이 선제공격했다는 당시의 목격담도 끊이지 않았다.<ref> 임영태, 《[[인류 이야기 현대편]] 2권》(아이필드 출판사 2004년) 124~128쪽</ref>
[[File:6.25 전쟁 시 한복 여성.jpg|right|thumb|230px|한국 전쟁 당시 입대하는 장정을 마중나온 여성 (대구)]]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구 [[소비에트 연방|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남한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ref name="donga">[http://www.donga.com/fbin/output?f=total&n=200807040180&top20=1 “60년대 마오쩌둥이 남한 무장봉기 강요” ], [[동아일보]]</ref>
반공주의자인 미국의 덜레스 장관이 남한을 방문하는 사건 등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ref name="donga" />
[[파일:Russia-attack-to-southkorea-plan.jpg|thumb|left|[[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비교적 폐쇄적인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북한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북한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입장으로 고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ref name="stalin_accept">[http://news.kbs.co.kr/tvnews/news9/2010/06/24/2118018.html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ref>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
[[북한]]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이 엇갈리고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 평가하고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 제기된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이론이다.
==== 스탈린 주도설 ====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줄 277 ⟶ 189:
그러나 스탈린 주도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갈등을 걱정하여 [[한국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였으며, 한국전쟁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인 사람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무려 48번이나 한국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했다. 김일성의 요구를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지만 김일성의 강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결국 [[전쟁]]을 승인하고 만다. <ref name="stalin_accept" />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북한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ref name="cia_mistake" />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 북한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남한)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했으나 대답이 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곧 국제연합군(UN군)도 진격시작, 평양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 인민해방군|
# 고착 전쟁([[1951년]] [[6월]] ~ ) :
[[북한]] 위주이거나 북한을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북한]]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평가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 전쟁준비 ==
=== 조·소 비밀회담 ===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였고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회의에는 북한과
1949년 2월 스탈린은 북한정권 수립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북한의 수뇌부는 방문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ref>Max Beloff, ''Soviet Foreign Policy In the Far East, London : Oxford University Press'', 1952, pp.17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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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북한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남한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남한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병사 (군인 계급)|병]]<ref>[[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병]]이라 한다.</ref>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아주 허술하게 대응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2/17/3628371.html?cloc=nnc 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37) 평양서 발견한 전쟁 준비 문서], 《[[중앙일보]]》, 2010년 02월 17일</ref>
==
===
{|class="wikitable" align="right"
|+'''남북한 군사력 비교(1950년 기준)'''
!항목!!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br>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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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발 ===
[[파일:T-34-85-korea.jpg|thumb|
[[파일:1950-northkorea-infantry-arms.jpg|thumb|left|개전 초기 북한군 보병의 기본 화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탱크|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한국]](남한)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남한]]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ref>{{서적 인용 |인용문=이전부터 38선~반복하고 있었다. |저자=노정팔 |제목=한국방송과 50년 |꺾쇠표 = 예|출판사=나남 |발행년도=[[1995년]]|쪽=159~16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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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ref>{{서적 인용 |인용문=[[1950년]] [[6월 26일]]~도움을 요청하였다.|저자=[[이한우]]|제목=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下)|꺾쇠표 = 예| 출판사=[[조선일보사]]|발행년도=[[1996년]]|쪽=78~79}}</ref> 그 직후, [[이승만]]은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특별시|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광역시|대전]]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이승만]]은 [[대전광역시|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광역시|대전]]을 떠나 [[익산시|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시|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광역시|대구]]로 옮겨갔다. [[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파일:Americanexecuted1950korea.jpg|thumb|처형된 미군]]
[[파일:South Korean soldiers walk among dead political prisoners, Taejon, South Korea.jpg|thumb|[[보도연맹 사건]]]]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특별시|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광역시|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광역시|대전]]으로 내려갔다. <ref>{{서적 인용 |인용문=[[1950년]] [[6월 27일]]~[[대전]]으로 내려갔다. |저자=강준만 |제목=앞의 책 |쪽=51}}</ref>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시|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광역시|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광역시|대전]]을 떠나 [[익산시|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시|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광역시|대구]]로 옮겨갔다.<ref>{{서적 인용|인용문=[[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정식으로 의결되었다.|저자=전쟁기념사업회|제목=《한국전쟁》 제3권 |꺾쇠표 = 예 |출판사=행림출판|발행년도=[[1992년]]|쪽=39}}</ref>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시|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ref>{{서적 인용|인용문=[[6월 27일]] 아침 6시에~|저자=노정팔|제목=앞의 책|쪽=161~162}}</ref> [[서울특별시|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군이 [[미아리고개|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특별시|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광역시|대전]]으로 옮겼다. [[6월 27일]] [[보도연맹 사건|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이 집행됐다. 이 처형은 이승만이 명령한 것으로 알려졌다.<ref>[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607.html 60년 만에 만나는 한국의 신들러들]<br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0451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민간인 처형 집행했던 헌병대 간부 최초증언 출처 :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 오마이뉴스]</ref>
[[파일:1950-southkorea-infantry-arms.jpg|thumb|한국전쟁 초기, 남한군 보병의 기본 화기]]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ref>{{서적 인용|저자=김동춘 |제목=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꺾쇠표 = 예 |출판사=돌베개|발행년도=[[2000년]]|쪽=91}}</ref>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ref>{{서적 인용|인용문=당시의 전황으로~|저자=이한우|제목=앞의 책|쪽=84}}</ref> 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ref>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171~172쪽</ref>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광역시|부산]], [[포항시|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광역시|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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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군의 참전 ===
[[파일:Korean war 1950-1953.gif|thumb|230px|[[1950년]]부터 [[1953년]]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한미관계|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국제 연합|유엔]]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2호|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ref>{{서적 인용 |인용문=이에 따라~(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저자=이기택 |제목=국제정치사 |꺾쇠표 = 예 |출판사=일신사|발행년도=[[2000년]] |쪽=471~472}}</ref>
[[파일:Chang Myon 194804'.png|thumb|left|210px|[[장면]], 주미한국대사<br />(그는 미국과 UN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여 개입을 성사시킨다.]]
같은 날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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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The United States Representative at the United Nations (Austin) to the Secretary of State |인용문=He said that 38th parellel was meaningless and that liberation and unification of all of Korea was essential, after which there should be UN supervised elections for whole country. |작품명=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54 }}</ref>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 (Allison)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Rusk) |인용문=...the action of the North Korean forces had obliterated the 38th parallel and that no peace and order could be maintained in Korea as long as the division at the 38th parallel remained. |작품명=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73 }}</ref>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Embassy in Korea |인용문=16. Press report June [July] 13 quotes Pres Rhee as voicing determination ROK not to stop at 38th parallel in repelling invaders. |작품명=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87 }}</ref>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북한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남한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ref>{{웹 인용 |url = http://www.trumanlibrary.org/oralhist/muccio1.htm |제목= Oral History Interview with John J. Muccio |출판사= Harry S. Truman Library }}</ref> 장면과 이승만의 언명 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을 시점부터 이미 통일의 호기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ref>{{서적 인용 |저자=[[박명림]] |제목=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발행년도=2002|출판사=나남|출판위치=서울 |id=ISBN 89-300-3939-1 |페이지=552쪽|꺾쇠표=예}}</ref>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은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물]]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대한민국]]은 [[대전]]을 빼앗기고 난 다음에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이 무렵 [[한국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다.
==== 대구 후퇴와 다부동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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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에서의 설득 작업 ====
그러나 [[소련]]과 [[중국]] 측은 6.25 전쟁이 남한의 선제 공격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이었던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이사회에 출석했다.<ref name="회고록113">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3페이지</ref> 의장석에 앉은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그 동안의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리의 모든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과,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파일:John Myun Chang.jpg|썸네일|왼쪽|230px|UN 회의에 참석, [[소련]] 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장면 대표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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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대표는 9월에 열린 UN 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는데, 9월 안보리 의장국은 [[영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영국 측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자 [[장면]]은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국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ref name="회고록114">장면,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3페이지</ref>여 장면 대표는 무난히 착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장면 대표는 “그 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였다.<ref name="회고록114"/>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 발언!”이라며 그의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말리크는 그에게 “도대체 저 자가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 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장면은 말리크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ref name="회고록114"/>
{{인용문|대한민국에는 이승만 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헌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의장의 초청으로 착석했노라.<ref name="회고록"/> {{Rp|115}}}}
그는 약 40여 분간 공산권의 “남한의 북침” 주장과 “한국민들끼리의 내란”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국제사회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 ===
[[파일:Battle of Inchon.png|thumb|
{{본문|인천 상륙 작전}}
[[파일:IncheonLandingMcArthur.jpg|thumb
[[파일:압록강에서 물을 수통에 담고있는 6사단 7연대 병사.jpg|thumb|200px|[[1950년]] [[10월 26일]]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고있는 [[6사단]] 7연대 병]]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 제2단계로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를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또한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정부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북한은 지금의 자강도의 중심지인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했다(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을 때 [[미국 1 해병사단]]의 목표가 바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시도하다가
===
{{본문|1·4 후퇴}}
[[파일:ChineseKoreanWarPoster.jpg|thumb|중공군이 한국에서 이룬 "승리"를 보여주는 중국의 포스터]]
[[한국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공의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리고 중공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공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공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대만도 [[중화민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국땅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공, 북한 등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중국인민해방군|인민해방군]](중공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어느 곳에서는 53만 명이상이라 기록하기도 한다.)
그리고 중공이 개입할 당시, 소련이 중공에게 많은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전투기들도 중공 마크를 달고 쳐들어오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넘치는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 중공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12월 4일]]에 평양철수를 하고 이어 북한은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한편, [[12월 9일]]부터는 [[UN]]군이 [[원산]]을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한국군 [[국민방위군]] 9만명이 간부의 횡령에 의해서 아사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0623016 '국민방위군' 희생자 56년만에 '순직' 인정)</ref>
중공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ref>이승만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ref> [[2월]] 이승만은 38선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중공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서울 바로 위에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옆으로 일렬로 서 있었고, 동부(강원도 쪽)에서 북한과 중공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공, 북한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소련이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 휴전 협정 ===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정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정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을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나중에
그리고 또한, [[1953년]] [[3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그 배경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참조''), [[1953년]] [[3월 19일]] [[소비에트 연방|소련]] 내각은 '한국 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ref>{{서적 인용|인용문=군사분계선 문제는~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저자=온창일|제목=〈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ref><ref>{{서적 인용|편집자=한국전쟁연구회|제목=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꺾쇠표 = 예|출판사=백산서당|발행년도=[[2000년]]|쪽=38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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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의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발하였다. [[2010년]]에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 망명 정부 계획 ===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ref name="야마" />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ref name="야마"/>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ref name="야마"/>
한편, [[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이동시켜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새로이 '신한국'을 창설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한다.<ref> KBS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참조. </ref><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042289 동남어문학회 '낙동강과 한국전쟁' 학술대회] </ref>
== 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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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
[[파일:Geochang massacre.jpg|thumb|[[거창 양민학살 사건]]]]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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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한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ref> {{서적 인용|인용문=한국 전쟁은 이승만이~수 있었다.|저자=김동춘|제목=앞의 책|쪽=292}} </ref>
그러나 한국 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 북한 ===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한국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 [[김무정]] 등 자신의 정적들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숙청하여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드러났다.
[[공산주의]]적인 산업화 즉, [[통제경제]]에 따른 산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경제적인 상황이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남한]]과의 비교에서 매우 악화되었다. <ref>{{서적 인용|인용문=전쟁 과정에서~계기를 얻었다.|제목=같은 책|쪽=292}}</ref>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대규모 공업단지가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남한보다 공업이 발전한 선진국이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이러한 피해, 이후 족벌독재,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게 되어 1970년대에는 경제가 역전되어 [[대한민국|남한]]보다 후진국이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지원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ref>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270쪽, 한국학술정보 2008년, ISBN 978-89-534-6814-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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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ill303.png|thumb|[[:en:Hill 303 massacre|303고지 학살 사건]]]]
{{부분토막글}}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 [[미국]]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다.
=== 중국 ===
{{부분토막글}}
=== 기타 국가 ===
=== 터키 ===
[[터키]]군은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1만4936명을 파병하였고, 724명이 전사하였다.<ref>정철근, [http://news.joins.com/article/305/4494305.html 전쟁고아도 챙겼던 [[터키]] 노병 “한국 발전 감사” ], 중앙일보</ref>
== 전쟁
===
한국 전쟁 중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의 양민 학살 사건, 정치인 납북 사건, 협력자 사살 등의 문제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있다.
또한 전쟁 중 [[조선인민군]] 등에 의해 행해진 인민재판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고 있다.
=== 한국군 위안부 문제 ===
[[한국군 위안부]] 문제 역시 1990년대 이후 새로이 드러나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 한국군위안부는 북한 점령지에 있던 여성들 중 빨갱이를 도왔다는 이유로 10대~20대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가서 국군의 성노예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들의 전재는 철저히 은폐되다가 1990년대부터 수면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뒤 [[2002년]] 김귀옥 박사가 [[일본]] 신문에 실렸던 한국군 위안부 존재의 증거를 공식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ref>[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323/TM_0302.html <nowiki>[</nowiki>미니 인터뷰<nowiki>]</nowiki>‘한국군 위안부’문제 제기한 김귀옥 박사 :“밝혀진 건 퍼즐의 일부”] 일요시사 2002년 3월 26일 323호</ref> 또한 그해 3월에는 한국정신대연구소 강정숙 연구위원이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ref name="han010">[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1510 한국군 위안부 문제, 뇌관은 남아있다 - 오마이뉴스]</ref> 또한 한국 전쟁에 한국군 지휘관으로 출전했던 김희오 장군(예비역 소장) 역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증언하였다. 김희오의 회고록 <인간의 향기>. 34년간의 군 생활에서 한국전쟁 당시 처음 본 공개적 군 위안소 운영 사례에 대해 '영원히 찜찜한 기억'으로 기록하고 있다.<ref name="han010"/>
== 평가 ==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북한]] 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대한민국|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지금까지도 분단 국가로 남아있다. <ref> {{뉴스 인용|제목 = "다시 보는 한국 전쟁"|url= http://pann.nate.com/video/16100770|작성일자 = 2007.09.02 19:12
}}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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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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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드넌스 ML 3인치 박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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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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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갑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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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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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갑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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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민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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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갑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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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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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갑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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