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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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정보
|분쟁 = 한국 전쟁
|전체 = [[냉전]]
|그림 = Korean War Montage 2.pngjpg
|설명=한국 전쟁 중의 사진들
|그림크기= 300px
|날짜=[[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휴전)
|설명 = 위에부터 시계방향으로: 미 해병대가 [[장진호 전투]]에서 후퇴하는 모습; [[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 작전]]; 동생을 업은 피난민 소녀의 사진. 뒷 배경으로 [[M26 퍼싱]]이 보인다; 인천 상륙 작전에서 방벽을 넘는 미 해병대 [[발도메로 로페즈|로페즈 중위]]; 한국전쟁 당시 미국 공군의 주력기였던 [[F-86 세이버]] 전투기.
|장소=[[한반도]]
|날짜 =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 (3년 32일)
|결과=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br /> 본격적인 냉전체제 돌입 <br />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중앙집권 강화
|장소 = [[한반도]]
|교전국1=[[파일:Flag of the United Nations.svg|22x20px]] '''[[국제 연합]]:'''
|결과 = [[정전협정]] 체결 <br/> 한반도 분단의 고착화 <br/> 본격적인 [[냉전]] 체제 돌입 <br/>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중앙 집권 강화 <br/>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대한민국|남한]]에 대한 무력도발 저지 <br/> [[국제연합|U.N]]군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대한 침공 저지 <br/>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대한민국|남한]]에 대한 침공 저지 <br/> [[북위 38도|38도 선]]을 대신한 [[한반도 비무장 지대]]의 설치<br/>
|교전국1 = [[파일:Flag of the United Nations.svg|22x20px]] '''[[국제 연합]]:'''
{{KOR}}<ref>[[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이 [[1950년]] [[7월 14일]] 미군에 이양됨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 역시 국제연합군 산하에 편입되어 전쟁에 참여하였음. 따라서 대한민국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국제연합군 소속으로 분류함. </ref><br />
{{국기나라|미국|1912USA}}<br />
{{AUS}}<br />
{{GBR}}<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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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지원국'''<br />
{{JPN}}<br/>
|교전국2=[[파일:Hammer and sickle.svg|22px]] '''공산군'''
{{PRK}}<br />
{{CHN}}<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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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그림|불가리아|1946}}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br />
[[파일:Flag of Romania (1965-1989).svg|21px]]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병력1 =
UN군 사령부: <ref> 주의: 출처에 따라 수치는 다를 수 있음. </ref>
{{ROK}} 590,911 명 <br />
{{USA}} 480,000 명<br />
{{GBRAUS}} 5만 60008407 명<br />
{{국기나라|CAN|1921}} 2만 5687 명<br />
{{TUR}} 1만 4936 명<br />
{{AUS}} <br/> 8407 명<br />
{{PHL}} 7420 명<br />
{{NZL}} 3794 명<br />
{{GBR}} 5만 6000 명<br />
{{PHL}} 7420 명<br />
{{TUR}} 1만 4936 명<br />
{{NLD}} 3522 명<br />
{{LUX}} 44 명<br />
{{COL}} 1,068 명<br />
{{BEL}} 900 명<br />
[[파일:Flag of Ethiopia (1897).svg|22x20px]] [[에티오피아 제국|에티오피아]] 1,271 명<br />
{{FRA}} 1,119 명<br />
{{국기나라|그리스|1828}} 1,263 명<br />
[[파일:Flag of South Africa 1928-1994.svg|22x20px]] [[남아프리카 연방]] 826 명<br />
{{THA}} 1,294 명<br />
{{국기나라|그리스|1828}} 1,263 명<br />
{{FRA}} 1,119 명<br />
{{COL}} 1,068 명<br />
{{BEL}} 900 명<br />
[[파일:Flag of South Africa 1928-1994.svg|22x20px]] [[남아프리카연방]]826명<br />
{{LUX}} 44 명<br />
 
'''총: 1,198,462 명'''
|병력2 =
공산군:
{{PRK}} 260,000 명<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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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R}} 26,000 명<br />
'''총: 1,066,000 명'''
|지휘관1=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승만]]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정일권]]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백선엽]]<br /> {{국기그림|대한민국}} [[김홍일]]<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형근]] <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채병덕]]<br /> {{국기그림|대한민국}} [[이응준 (군인)|이응준]] <br /> {{국기그림|USA}} [[해리 S. 트루먼]]<br /> {{국기그림|미국}} [[더글러스 맥아더]]<br />{{국기그림|미국}} [[매슈 리지웨이]]<br />{{국기그림|미국}} [[마크 웨인 클라크]]<br />{{국기그림|미국}}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드와이트 아이젠하워]]<br /> {{국기그림|미국}} [[월턴 워커]]<br /> {{국기그림|미국}} [[윌리엄 F. 딘]]<br />{{국기그림|영국}} [[클레멘트 애틀리]]<br /> {{국기그림|터키}} [[타흐신 야즈즈]]<br /> {{국기그림|프랑스}} [[몽클라르]]<br /> {{국기그림|필리핀|1919}}[[엘피디오 퀴리니오]] <br />
|지휘관2= {{국기그림|북한}} [[김일성]] <br /> {{국기그림|북한}} [[박헌영]] <br /> {{국기그림|북한}} [[최용건]]<br />{{국기그림|북한}} [[김책]]<br /> {{국기그림|북한}} [[김무정]]<br /> {{국기그림|북한}} [[김광협]]<br /> {{국기그림|북한}} [[전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전우]]<br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 <br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 [[펑더화이]]<br />{{국기그림|소비에트 연방}} [[이오시프 스탈린]]<br />{{국기그림|소비에트 연방}} [[게오르기 말렌코프]]
|사상자1 =
{{국기그림|대한민국}} 남한<br /> '''군인''' <br />전사: 14만 9005명 전사 <br />부상: 71만 783명 부상 <br />실종: 13만 2256명 실종 <br /> '''민간인''' <br />사망: 37만 3599명 사망 <br />부상: 22만 9625명 부상 <br />실종: 30만 3212명 행방불명 <br /> '''총계''' <br />사망: 52만 2604명 사망 <br />부상: 94만 408명 부상 <br />실종: 43만 5468명 실종 <br /> 총계 189만 8480명 사상
<br />
{{국기그림|USA}}미국 <br />전사: 3만 6940명 전사 <br />부상: 9만 2134명 부상 <br />실종: 3737명 실종 <br />포로: 4439명 포로 <br /> 총계 13만 7250명
<br />
{{국기그림|영국오스트레일리아}} 영국<br /> 339명 전사: 1078명<br />부상: 1216명 부상 2674명<br /> 3명 실종: 179명<br /> 26명 포로: 997명<br /> 총계 4908명1584명
<br />
{{국기그림|터키캐나다|1921}} 터키<br /> 312명 전사: 741명<br />부상: 2068명1212명 부상 <br /> 1명 실종: 163명<br /> 32명 포로: 244명<br /> 총계 3216명1557명
<br />
{{국기그림|오스트레일리아영국}}호주 <br /> 1078명 전사: 339명<br />부상: 1216명2674명 부상 <br /> 179명 실종: 3명<br /> 997명 포로: 26명<br /> 총계 1584명4908명
<br />
{{국기그림|캐나다|1921뉴질랜드}}캐나다 <br /> 23명 전사: 312명<br /> 79명 부상: 1212명<br />실종: 1명<br />포로:실종 32명<br /> 총계 1557명103명
<br />
{{국기그림|네덜란드필리핀}} 네덜란드<br /> 112명 전사: 120명<br /> 229명 부상: <br /> 16명 실종 645명<br /> 41명 포로: 3명<br /> 총계 768명398명
<br />
{{국기그림|필리핀터키}} 필리핀<br /> 741명 전사: 112명<br /> 2068명 부상: 229명<br /> 163명 실종: 16명<br /> 244명 포로: 41명<br /> 총계 398명3216명
<br />
{{국기그림|뉴질랜드네덜란드}} 뉴질랜드<br /> 120명 전사: 23명<br /> 645명 부상: 79명<br />실종: 1명3명 포로 <br /> 총계 103명768명
 
<br />
'''총계:''' 47만 4000명474,000명 이상
|사상자2=
{{국기그림|북한}}북한 <br /> '''군인''' <br />전사: 29만 4000명 전사 <br />부상: 22만 6000명 부상 <br /> 12만 명 실종 및 포로: 12만 명 <br /> '''민간인''' <br />사망: 40만 6000명 사망 <br /> 부상: 159만 4000명 부상 <br />실종: 68만 명 행방불명 <br /> '''총계''' <br />사망: 70만 명 사망 <br />부상: 182만 명 부상 <br />실종: 80만 명 실종 <br /> 총계 332만 명 사상
 
<br />
{{국기그림|중화인민공화국}}중국 <br />전사: 13만 5600명 전사 <br />부상: 20만 8400명 부상 <br /> 2만 5600명 실종 및 포로: 2만 5600명<br /> 총계 36만 9600명 사상
<br />
{{국기그림|소비에트 연방}}소련 <br />전사: 315명 전사 <br />부상: 500명 부상 <br /> 총계 715명
 
'''총계:''' 1,190,000명 ~ 1,577,000명 이상.
}}
'''한국 전쟁'''(韓國戰爭)<ref>{{출처|[[대한민국]]에서는 '''6·25 사변'''(六二五事變)을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다.}} 또는 '''6.25 사변''', '''6·25 동란''', '''6·25 전쟁''',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북한]]의 명칭)은 하지만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표기법을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사전들은 '''한국 전쟁'''이라는 말 대신 '''6·25 전쟁'''이라고 규정한다.</ref>은 [[1950년]] [[6월 25일]] 이후 발생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전쟁 또는 내전이다. [[대한민국]]측 견해에 의하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에 한반도를 지나는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유하고 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이남의 [[대한민국]]을 남침함으로써 발발한 전쟁이라 한다. [[1953년]] [[7월 27일]]의 정전 협정으로 말미암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현재까지 서류상으로 [[휴전]] 중이지만, 휴전 이후 쌍방 간에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발생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치른 [[냉전]]시절의 양대 전쟁의 하나로서, 미군은 한국전쟁에서 3만여 명이 사망했다. 전쟁의 성격을 두고 내전인가 외세가 주가 된 전쟁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한국 전쟁 중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의 양민 학살 사건, 정치인 납북 사건, 협력자 사살과 인민재판, [[한국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 전쟁'''(韓國戰爭. [[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ref>{{출처|[[대한민국]]에서는 '''6·25 사변'''(六二五事變)을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다.}} 또는 '''6.25 사변''', '''6·25 동란''', '''6·25 전쟁''',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북한]]의 명칭)은 하지만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표기법을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의 모든 사전들은 '''한국 전쟁'''이라는 말 대신 '''6·25 전쟁'''이라고 규정한다.</ref>은 [[국제 연합 평화유지군|국제 연합군]]과 [[미합중국]]의 지원을 받은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군사·물자의 지원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간의 전쟁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은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 [[일본제국]]이 점유하고 있던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합의로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의 남반부는 미국군이, 한반도의 북반부는 소련군이 점령하게 되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948년]] 한반도 전역에서 치르기로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자유선거]]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남·북 양측의 갈등은 깊어졌고, 북측은 [[공산주의]] 정부를 남측은 [[자본주의]] 정부를 각각 수립한다. 개별정부 수립이후 [[북위 38도|38도]]선은 남과 북의 정치·군사 분계선이 되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통일 정부 구성을 위한 논의가 계속되었지만, 긴장은 고조 되어만 갔다. [[북위 38도|38도]]선 부근에서는 크고 작은 교전이 끊이질 않았다. 상황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북위 38도|38도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남침함으로써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한국 전쟁은 [[냉전]]기간 동안 발생한 첫 군사적 충돌이었다.
[[1950년]] [[소비에트 연방|소련]]은 [[국공 내전]]에서 패배한 [[타이완]]의 [[중화민국]] 국민당 망명 정부가 [[국제 연합]]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것에 항의하고,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안전 보장 이사회]] 참석을 거부했다.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소비에트 연방|소련]]이 [[국제 연합 안전 보장 이사회|안전 보장 이사회]]에 불참함에 따라, 한반도에서 [[국제 연합]]군의 군사적 개입을 승인하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이 통과될 수 있었다.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미국]]([[국제연합|연합]]군의 88%를 차지)과 다른 [[국제 연합]]회원국의 ([[국제연합|연합]]군의 12%를 차지) 병력이 [[대한민국]]을 돕기위해 도착하지만, 전쟁 발발후 불과 두달만에 방어선이 부산 인근의 [[낙동강 전투|낙동강]]까지 밀리게 된다. 이후 [[국제연합]]군은 빠른 반격을 통해 [[조선인민군|인민군]]을 38도선을 지나 [[압록강]]부근 까지 밀어낸다. 전세가 [[조선인민군|인민군]]에 불리하게 되자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을 결정해 [[국제 연합|U.N.]]군을 다시 38도선 이남으로 후퇴시키고, 소련은 [[조선인민군|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중국군]]에게 물자를 지원한다.
 
[[1953년]] [[7월 27일]]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정전협정]]에 따라 [[북위 38도|38선]]부근에 4km 너비의 [[완충 지대]]인 [[한반도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 휴전 이후 오늘날까지도 국지적 분쟁은 때때로 계속되고 있다.
 
전쟁의 성격을 두고 내전인가 외세가 주가 된 전쟁이냐에 대한 논란이 있다.
<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20087]
노컷뉴스, 노무현 대통령, '내전' 발언 논란,2006년 11월 21일
</ref>
<ref>
노컷뉴스, 한나라 "노대통령, '내전' 발언 즉각 취소해야", 2006년 11월 21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20153]
</ref>
[[군사학]]적 측면에서, 한국 전쟁은 [[제 1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의 [[전략]]·[[전술]]이 모두 사용된 전쟁이다: 전쟁은 [[보병]]의 신속한 배치와 이를 뒷받침할 [[전술]]적 [[폭격]]으로 시작되었지만, [[1951년]] 7월이후 [[제 1차 세계 대전|1차 세계대전]]과 같은 지루한 공방전의 양상을 보였다.
 
== 개요 ==
[[파일:Korean war 1950-1953.gif|thumb|300px|[[1950년]]부터 [[1953년]]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경,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과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의 지원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제조한 탱크를탱크로 앞세워 북위 38도 선을38선을 넘어 기습남침해 남침했다왔다. 25일 오전 9시경에는 [[개성특급시|개성]] 방어선이방어선을 격파되고격파하고 당일 오전에 [[동두천시|동두천]], [[포천시|포천]] 인민군에게 넘어갔다함락시켰다. [[조선인민군]]은 26일 오후에 [[의정부시|의정부]]를, 27일 정오에는 이미 [[서울특별시|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넘고 있었다. 창동 방어선이 뚫린 대한민국 국군은 [[강북구]]의 미아동에 있는 [[미아리 고개]]에 미아리 방어선을 구축하였으나 [[조선인민군]]의조선인민군의 전차에 의해 붕괴되었다. 28일 새벽 2시 30분에는 [[한강]]에 있던 [[한강대교]]가 폭파되었고, 이후 서울에는 재수복이 될 때까지 인민군이공산군이 주둔하였다. [[7월 14일]]에는 대한민국 국군의 지휘권이 미군에게 넘어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광역시|대전]]에서 [[대구광역시|대구]]를 거쳐 [[부산광역시|부산]]까지 이전했다. [[1950년]] [[9월 15일]]에는 [[인천 상륙 작전]]으로 같은 해 [[9월 28일]]에 [[낙동강 방어선]]을 넘었고, [[10월 1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직할시|평양]]에 다다랐으나, [[인민해방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으며, 그 와중에 [[거창 양민 학살 사건]], [[국민 방위군 사건]] 등의 사건이 일어났다. [[1953년]] [[7월 27일]]에는 [[휴전선]]을 중심으로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한국 전쟁은 원칙적으로 현재까지도 존속되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이 결과로 남북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었다.
[[낙동강 전투]]를 통해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하던 국제 연합군은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단행해 [[9월 25일]] 한국군이 서울을 재수복 한다. [[10월 19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평양직할시|평양]]을 지나서 [[압록강]]에 다다랐으나,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세가 역전되었다.
 
=== 다양한 호칭 ===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한반도 비무장 지대]]가 완충지대로 설치되었다. 정전협정으로 끝난 한국 전쟁은 원칙적으로는 오늘날까지 진행중이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6·25 사변'''(六二五事變)(정부의 호칭)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ref>[http://stdweb2.korean.go.kr/main.jsp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한국전쟁'으로 검색</ref>, 그 밖에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으로 부른다. 초기부터 80년대까지는 6.25사변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80년대 민주화투쟁시국의 진보적 지식계층에서 외국(특히 미국)의 문헌에 등장하는 "Korean War"를 타국의 사건을 다루듯 직역해서 "한국 전쟁"으로 번역보급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어 각종 학계와 언론, 출판계에서까지 따라 사용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한국 전쟁'이라는 호칭은 이 전쟁이 마치 제3의 국가에서 벌어진 듯 보이게 하는 점이 문제라고 주장한다.<ref>{{뉴스 인용
 
==== 명칭 ====
 
[[대한민국]]에서는 전쟁 발발일을 기념하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6·25 사변'''(六二五事變)(정부의 명칭) 혹은 '''6.25 전쟁'''(六二五戰爭)<ref>[http://stdweb2.korean.go.kr/main.jsp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한국전쟁'으로 검색</ref>, 그 밖에 '''한국전쟁''', '''한국동란'''(韓國動亂), '''6·25 동란'''(六二五動亂)이라 부른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전쟁'''(祖國解放戰爭) 또는 '''조선전쟁'''으로 부른다. <br/>초기부터 80년대까지 6.25사변이란 용어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나, 80년대 민주화 투쟁 시국의 진보적 지식계층에서 미국등 외국의 문헌에 등장하는 "Korean War"를 직역해서 "한국 전쟁"으로 보급한 것이 유행이 되어 각종 학계와 언론·출판계에서까지 따라 사용하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한국 전쟁'이라는 명칭은 이 전쟁이 마치 제3의 국가에서 벌어진 듯 보이게 하는 점이 문제라고 주장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 '6·25전쟁'이냐 '한국전쟁'이냐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6/21/2010062100181.html
줄 149 ⟶ 123:
}}</ref>
 
다른 국가들은 '''조선 전쟁'''({{ja-y|朝鮮戦争|ちょうせんせんそう}}, [[일본]]), '''항미원조전쟁'''({{zh-t|t=抗美援朝戰爭}}, [[중화인민공화국]]), '''한국/조선 전쟁'''(Korean War)<ref>Korea의 역번역은 ‘한국’과 ‘조선’ 둘 모두 가능하다. 이와 관련해서는 [[한국]] 문서를 참조 하십시오참조하라.</ref>) 등 입장에 따라 다르게제각기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미국에서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불리기도 한다.
 
미국 [[해리 S. 트루먼|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초기, 한국 전쟁을 [[국제연합]]의 지지를 받는 '(전쟁이 아닌) 경찰 행위'로 표현하였다.
<ref>[http://teachingamericanhistory.org/library/index.asp?document=594] Truman, Harry S. (29 June 1950)</ref>
비공식적으로는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는 전쟁(The Unknown War)'으로 표현된다. 한국 전쟁은 많은 미군 사상자를 냈음에도, 미국내에서 한국전 이전과 이후 미국이 참전한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에 비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ref>[http://www.history.navy.mil/ac/korea/korea1.htm] "Remembering the Forgotten War: Korea, 1950–1953" Naval Historical Center</ref>
 
== 배경과 원인==
=== 소련의 만주 침략 (1945년) ===
{{참조|8월 폭풍 작전}}
 
[[제 2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될 무렵,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미국과의 합의에 따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8월 10일]] 소련의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붉은 군대]]는 한반도 북반부를 점령하고, [[8월 26일]]에는 [[북위 38도선]]에서 미군이 남쪽에서 북진해오기를 기다리며 3주동안 진격을 멈춘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항복]]이 다가오자, 미국은 한반도 북부를 먼저 점령한 소련이 합의문을 성실히 이행할지에 대해 의심했다. 한달전, 미국측 점령지에 최소 두개의 항구를 포함 시키려고한 미군의 [[딘 러스크]]대령과 찰스 H. 본스틸대령은 즉흥적으로 한반도를 [[북위 38도선]] 기준으로 분할하기로 결정한다.
 
왜 [[북위 38도선]]이 연합군 점령지의 경계로 정해졌는지를 설명하면서, [[딘 러스크]]는 이렇게 말했다.<ref>Goulden, Joseph C (1983).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New York: McGraw-Hill. p. 17. ISBN 0070235805.</ref>
: "비록 북위 38도선이 (미군이) 약속된 날짜까지 도달할수 있는 현실적 목표 (즉, 소련군이 합의문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도달할수 있는 위치) 보다 더 북쪽에 있었지만 ... 우리는 수도 서울을 미군 관할 지역에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미국이 한반도에서 겪는) 시간·공간적 제약과 신속하게 파병할수 있는 병력 부족등을 고려할때 보다 북쪽으로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소련은 동유럽 점령지 분할에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고, 또 미국과 소련이 동등하게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미국이 제시한 38도선 기준 분할안에 동의하였다. <ref>Stokesbury, James L (1990). A Short History of the Korean War. p=25. New York: Harper Perennial. ISBN 0688095135.</ref>
 
=== 중국 국공 내전 (1945-1949) ===
{{본문|국공 내전}}
 
[[중일 전쟁|2차 중-일전쟁]]이 끝나자,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국민당]]간의 내전이 재발하였다. [[중국 공산당]]이 만주를 차지하기 위해 고전하는 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중국 공산당]]에게 물자와 병력을 지원했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110.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중국측 기록에 따르면 북한은 열차 2,000량분에 해당하는 물자를 지원했고, 수천명의 조선인 ''지원자'' 들이 참전해 [[중국 인민해방군]]과 함께 싸웠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110-111.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또한 북한은 만주에 있던 [[중국 공산당]] 비 전투요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이들이 중국 내부와 연락할수 있는 통신시설을 제공했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110.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국공 내전]]기간 북한의 지원을 받은 [[중국 공산당]]은 내전에 승리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한 이후에도 잊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지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5만명-7만명 사이의 [[중국 인민해방군|인민해방군]]소속 조선인 참전 군인들을 무기와 함께 북한에 되돌려 주었다. 국공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이들 병사들은 한국전 초기 남침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110.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중국은 남-북한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도울것을 약속한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111.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그러나 중국의 간섭은 북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내분을 가져왔고, 중국 공산당의 후원을 등에 업은 박일유 분파는 [[김일성]]의 권위에 도전하기도 했다. 김일성은 이후 박일유를 숙청했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110.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이후, 중국 정부는 미국이 이끄는 서방 세계를 체제 안정의 가장큰 걸림돌로 지목한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26.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중국 지도부는 (1)19세기초 부터 시작된 중국의 '백년국치'(百年國恥)의 역사<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262.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2)국공 내전동안 미국이 국민당을 지원한 사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41.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3)혁명세력과 반동세력의 이념 투쟁<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21.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때 중국 본토가 공산주의를 탄압하는 미국 ''십자군 원정'' 의 주요 격전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19.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공산주의 진영내 중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한편 미국의 공세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수단으로, 중국 공산당은 중국 주변국의 공산 혁명을 적극 지원하는 대외 정책을 채택한다.<ref>Chen, Jian (1994). China's Road to the Korean War: The Making of the Sino-American Confrontation. p=25-26.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ISBN 978-0-231-10025-0.</ref>
 
=== 한반도 분단 (1945-1949) ===
{{본문|한반도 분단}}
 
[[1945년]] 7월-8월 열린 [[포츠담 선언|포츠담 회담]]에서 소련, 영국, 미국의 연합국은 만장일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상의 없이 한반도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1943년]] [[카이로 선언|카이로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과 배치되는 것이었다.<ref>Stokesbury, James L (1990). A Short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Harper Perennial. ISBN 0688095135.</ref><ref>Appleman, Roy E (1998) [1961].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pp. 3, 15, 381, 545, 771, 719. ISBN 0160019184.</ref><ref>Cumings, Bruce (1981). "3, 4". Origins of the Korean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ISBN 89-7696-612-0.</ref><ref>Becker, Jasper (2005).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019517044X.</ref>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선언으로 일제 강점기를 벗어났으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들어온 미국과 소련 연합군의 분할 점령에 놓인다. [[1945년]] [[9월 8일]], 미국 [[존 하지|존 R. 하지]]중장이 38도선 이남 일본군의 항복을 받기위해 [[인천]]에 도착했다. <ref>Appleman, Roy E (1998) [1961].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pp. 3, 15, 381, 545, 771, 719. ISBN 0160019184.</ref> 한국에 설치된 [[한국의 군정기|미군 군사정부]]의 책임자로 임명된 [[존 하지]]는 [[1945년]]부터 [[1948년]]까지 한반도 남반부를 통제했다. <ref>Halberstam, David (2007).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New York: Hyperion. ISBN 978-1-4013-0052-4.</ref>
 
[[존 하지|하지]]는 [[일제 강점기]] 일본에 협력한 한국인 관료, 경찰들을 중용해 치안을 유지했다.<ref>Hermes, Walter, Jr. (2002) [1966].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pp. 2, 6–9.</ref> [[한국의 군정기|미군 군사정부]]는 좌-우 합작정부였던 [[조선인민공화국]]이 공산주의 색채를 지진 것으로 의심해 승인을 거부하고, [[조선인민공화국]]은 출범 5개월만에 좌초한다. 한국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미군정의 정책은 시민들의 반발과 국지적 [[게릴라전]]을 일으켰다.<ref>Schnabel, James F. (1972).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3. Washington, DC: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pp. 3, 18. ISBN 0-16-035955-4.</ref>
 
[[1945년]] [[9월 3일]] 일본 제17 야전군 지휘관인 코즈키 요시오 중장은 소련군이 [[개성]] 부근에서 38도선 이남 지역을 침범하고 있다고 [[존 하지|하지]]에게 알려왔다. [[하지]]는 일본군 보고의 정확성을 신뢰하였다.<ref>Appleman, Roy E (1998) [1961].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pp. 3, 15, 381, 545, 771, 719. ISBN 0160019184.</ref>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를 통치하기로 합의했다. 한국민들의 의견은 회의에서 배제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한이 각각 5년 동안 후원국 이념에 따른 [[신탁통치령|신탁통치]]를 거친뒤 독립하도록 결정하였다.<ref>Stokesbury, James L (1990). A Short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Harper Perennial. ISBN 0688095135.</ref><ref>Becker, Jasper (2005). Rogue Regime: Kim Jong Il and the Looming Threat of North Korea.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019517044X.</ref>
 
한국인들은 이러한 결정에 격렬히 저항했다. 남한에서 사람들은 반대시위를 벌이거나 무력 봉기를 하기도 했다. <ref>Schnabel, James F. (1972). Policy and Direction: The First Year.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3. Washington, DC: Center of Military History, United States Army. pp. 3, 18. ISBN 0-16-035955-4.</ref> [[1945년]] [[12월 8일]] 미군정은 치안유지를 위해 시위를 금지시키고, [[12월 12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 혁명정부와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불법화 시켰다.
 
[[1946년]] [[9월 23일]] 8,000여명의 [[부산]]에서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부산지역에서 시작된 총파업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1946년]] [[10월 1일]], [[대구 10·1 사건|대구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시위]]에서 경찰 발포로 학생 3명이 숨졌다. 시위대가 이에 저항해 경찰 38명이 숨졌다. [[1946년]] [[10월 3일]], 1만여명의 시위대가 [[경상북도]] [[영천시|영천]]의 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관 3명이 숨지고, 40명이 다쳤다. 다른 곳에서는 20여명의 지주와 [[친일파]] 관료가 살해되었다.<ref>Cumings, Bruce (1981). "3, 4". Origins of the Korean War. Princeton University Press. ISBN 89-7696-612-0.</ref> 극심한 혼란속에 미군정은 [[계엄|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승만]]이 이끄는 우익 성향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는 소련과 미국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면서,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35년 동안의 [[일제 강점기]](1910-1945) 이후 또다른 외국 군대의 점령에 주장하였다. 미군정은 [[국제연합]] 감시하에 치뤄지는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서 남한 지역에 문민 반공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모스크바 3상회의|모스크바 회담]]에서 합의된 신탁통치를 앞당겨 시행한다.
 
[[1948년]] [[4월 3일]], 한국군에 의해 6만 여명의 제주도민들이 학살당했다.<ref> "Ghosts Of Cheju". Newsweek. 19 June 2000. Retrieved 6 December 2011.</ref>
 
[[1948년]] [[5월 10일]], 소련이 [[모스크바 3상회의|모스크바 회담]]의 미국측 이행을 촉구하며 반대하고 불참한, 남한만의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이 실시되었다.<ref>Stokesbury, James L (1990). A Short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Harper Perennial. ISBN 0688095135.</ref>
<ref>"Korea: For Freedom". TIME. 20 May 1946. Retrieved 16 December 2011.</ref>
선거는 [[테러리즘]]과 폭력으로 얼룩져 600여명의 사망자를 낳기도 했다.<ref>Stueck, William (2004). The Korean War in World History. Lexington: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p. 38. ISBN 0813123062.</ref>
 
3개월 뒤인 [[1948년]] [[8월 25일]] 소련군 점령지인 북한에서 독자적인 선거가 실시되었다. <ref>Malkasian, Carter (2001). The Korean War, 1950–1953. Essential Histories. London; Chicago: Fitzroy Dearborn. ISBN 1579583644.</ref>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총선]]으로 선출된 남한의 [[대한민국 제헌국회|제헌국회]]는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의 역사|제헌헌법]](건국헌법)을 제정하고, [[1948년]] [[7월 20일]] 간접선거로 미국에서 교육받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소련군 점령지인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다.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자와 [[좌익]]세력들을 남한 정치에서 배제시켰다. 이에 굴하지 않고 [[남조선로동당]]의 공산주의자들은 한국 정부에 대항해 산에서 [[게릴라전]]을 준비한다. <ref>Stewart, Richard W., ed. (2005). "The Korean War, 1950–1953". American Military History, Volume 2.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CMH Pub 30-22. Retrieved 20 August 2007.</ref>
 
[[이승만]]과 [[김일성]]은 각각 [[민족주의]]자로서 자신들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반도를 통일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ref>Stokesbury, James L (1990). p=27, A Short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Harper Perennial. ISBN 0688095135.</ref>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이 북한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다투면서<ref>白桦 (2010年 6月 26日). "韩战无赢家 中苏北韩领袖策划战争 [No winner in the Korean War, Soviet war plans North Korea leader]" (in Chinese). Voice of America. Retrieved 27 June 2010.</ref>,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동시에 이끌어 냈다.
 
북한은 38도선 부근의 국지전과 국경지대 습격으로 남-북한 긴장을 고조시켰고, 이를 통해 침략을 준비해 나갔다. 미국의 제한된 장비 지원으로 낡은 무기만을 보유하고 있던 한국군은 [[조선인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ref>Stokesbury, James L (1990). p=27, A Short History of the Korean War. New York: Harper Perennial. ISBN 0688095135.</ref> [[냉전]]의 초기였던 이 기간동안 미국은 국적을 불문한 모든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영향력 아래 움직인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소련의 지시로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다.<ref> Wainstock, Dennis (1999). Truman, MacArthur, and the Korean War. p. 137.</ref>
 
== 배경 ==
[[1948년]] 10월 [[제주 4·3 사건]]에 저항하는 좌익 한국군들이 [[여수·순천 사건|여수·순천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ref>^ "439 civilians confirmed dead in Yeosu-Suncheon Uprising of 1948 New report by the Truth Commission places blame on Syngman Rhee and the Defense Ministry, advises government apology". Hankyoreh. 8 January 2009. Retrieved 16 July 2010.</ref> [[1948년]] 소련군이 철수하고, 뒤이어 [[1949년]] 미군도 구식 무기만으로 무장한 한국군을 남겨둔채 한반도에서 철수한다. [[1949년]] [[12월 24일]], 한국군은 [[문경 양민 학살 사건]]에서 86-88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북한군 공비에게 떠넘겼다. <ref> "'문경학살사건' 유족 항소심도 패소" (in Korean). Chosun Ilbo. 6 August 2009. Retrieved 16 July 2010.</ref><ref>"두 민간인 학살 사건, 상반된 판결 왜 나왔나?'울산보도연맹' – ' 문경학살사건' 판결문 비교분석해 봤더니..." (in Korean). OhmyNews. 17 February 2009. Retrieved 16 July 2010.</ref>
=== 남북분단 ===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국기|일본}}이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거절하자 {{국기|미국}}은 일본 영토에 원자폭탄을 두 개 떨어뜨렸고 {{국기|소련}}군은 북한지역까지 진격했다. <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articleno=15609402&blogid=03uYb&categoryId=0&regdt=20100624211236#ajax_history_home 북한 남침 준비] </ref> 이로써 [[한반도]]는 8월 15일에 일본 식민지에서는 벗어났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38선]]을 일본군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진주한 소련군과 미국군에 의해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북쪽에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군정, 남쪽에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분할점령을 한국전쟁의 배경으로 보는 것 즉, [[공산국가]]인 [[소비에트 연방]]과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점령하여 [[이념]]대결을 벌인 전쟁이 한국전쟁이라는 곧 한국전쟁을 [[대리전쟁]]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논리]]적으로 무리가 있다는 설명이 있다. [[오스트리아]]와 [[독일]]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할점령되었으나, [[오스트리아]]는 [[1955년]] 분할점령을 끝내고 [[영세중립국]]으로서 [[통일]]국가가 되었고,<ref>《위클리 경향》,역사에서 미래를 묻다-한국전쟁60주년, 박태균 서울대학교 교수, 2010년 7월 6일자 p.41</ref> 독일도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되었지만 [[동방정책]]이라 불리는 외교적 노력으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대화와 교류를 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사실 연합국도 [[일본]]을 분할 통치할 계획은 있었으나 일본이 일찍 항복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 한국전쟁 직전 남북 군사상황 ===
==== 점령군 철수 ====
남쪽의 [[이승만]]과 북쪽의 [[김일성]]이 [[1948년]] 각각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움과 동시에 남북 간의 긴장은 더욱 강화되었다.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간부회의를 통하여 통일을 위하여 점령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였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시베리아]]로 철수하였고, [[1949년]] [[6월 29일]] 미군은 남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하였다.<ref>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한국학술정보, 2008년</ref>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비밀 협상을 하여 [[소련]]의 무기들이 [[북한]] 영토로 입수되었고 [[중국군중공군]] 역시 전쟁에 포함시키도록 하였다.
 
==== 미국의미 군부의 전략 ====
미국은미 군부는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50년대]] 당시의 [[미국미국군]]의 입장에서는 [[대한민국]]은남한은 전략적으로 전혀 가치가 없는 땅이었다땅덩어리에 불과하다 여겼다. 당시왜냐하면 당시의 미 미국은군부는 [[동북아시아]] 미국안보 정책을 미-소련 간의 충돌이3차대전의 일어날수 있는 잠재적잠재적인 격전지의 관점에서 바라봤다바라봤기 때문이다. 따라서미국 미국의군부 아시아수뇌부의 전문가들은사고관에서 '소련이만일 동북소련이 아시아에서동북아시아에서 3차 대전을 일으킬 가능성'이란 질문에의문으로 촛점을남한의 두고가치를 평가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사고였다. 만일 미국이 육군전을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남한에 [[대한민국주한미군]] 전략적배치할 가치를 평가하였다없었다.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발발할 경우에 한반도에 투입될 소련 육군과 미국의 육군은 [[군사학]]적으로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소련과 한반도는 땅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미국 육군은 한반도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태평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해군전과 공군전을 상정한다면 역시 한반도는 미국 입장에서 전혀 필요가 없었다. 어떠한 작전이라도 공군전과 해군전은 한반도를 우회해서 충분히 수행이 가능하였다.
만일 미국이 지상전을 상정한다고 생각하면, [[대한민국]]에 [[주한미군]]을 배치할 수 없었다. 또한 한반도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할 경우에도 미국과 소련은 지상군 투입 시간이란 측면에서 전략적 차이가 있었다. 소련과 한반도는 연결되어 있지만, 미국은 지상군을 한반도에 투입하기 위해서 [[태평양]]을 건너 병력을 수송해야만 했다. 만약 전쟁이 해전과 공중전의 형태로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미군의 한반도 주둔 필요성은 크지 않았다. 유사시에는 일본에 주둔한 해군과 공군을 급파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무력도발을 막아낼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은미 군부는 잠정적으로 한반도에서 미군을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만일 소련이 대대적인 도발을 감행할 경우에는 [[대한민국]]과남한과 [[대만]]을 포기하고 [[북태평양]]에 있는 [[얄류산 열도]]와 [[일본]]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도서방위선을 구축해 소련과 3차 대전을 대비한다는수행한다는 전략을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미국이미 군부가 1946년 비밀리에 수립한 핀서 계획과 문 라이즈문라이즈 계획이다. 핀서 계획과 문라이즈 계획의 도서방위선 구상이 바로 미군의주한미군의 전면 철수를 명시한 [[애치슨 라인]]의 원형이다.
 
==== 기타 ====
이 밖에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소련]]의 북한원조,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38선]] 분쟁도 한국전쟁의 배경이다.<ref>《[[위클리 경향]]》, 역사에서 미래를 묻다-한국전쟁60주년, 박태균 [[서울대학교]] [[교수]], [[2010년]] [[7월 6일]]자 p.41</ref>
*===== '''김일성의 스탈린 설득''' =====
북쪽의 김일성은 [[1949년]] 무렵부터 수차례 [[소련]]의 지배자인 [[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통치자인 [[마오쩌둥]]([[모택동]])을 만났으며, 공개된 [[구 소련]]의 문서에 의하면 그 당시 스탈린은 [[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인민군의 실력이 전쟁을 치를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더러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남한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 당시 스탈린은 북한에 강력한 군사적 원조를 하고 있었으나, 북한이 미국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단독으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수 차례 그를 설득하였고 스탈린 자신도 일부 연구자들이 옛 소련의 문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이론에 의하면, 미국을 시험하고 미국의 관심을 [[유럽]]에서 [[아시아]]로 돌리기 위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전쟁]] 원조를 [[북한]]에 하는 조건으로 김일성의 남침을 승낙하게 된다. 그런데 김일성 주석이 남침계획을 세우면서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바로 남한내 [[좌파]]가 자신들을 도울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이는 [[1949년]] [[남한로동당]] 등의 남한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이 반공정권이었던 [[이승만]] 정권의 [[공산주의]] 탄압에 의해 대대적으로 검거되었다는 것을 남한에서 온 공산주의자들의 허위보고로 생각한 까닭이었다.<ref>《위클리 경향》, 역사에서 미래를 묻다-한국전쟁60주년, 박태균 서울대학교 교수, 2010년 7월 6일자 p.42</ref>
 
*===== '''남한내부의 혼란''' =====
[[조선노동당]]의 [[일당독재]]를 기반으로 반대파([[민족주의자]], [[종교]]인 특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전 융성하던 [[개신교]], [[지주]], [[마름]], [[자본가]], [[기술자]] 등을 포함한 상당수의 북한 [[인민]])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통하여 북한 내 정치적 입지를 강하게 다지고 있던 [[김일성]] 주석과는 달리,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으로 귀국한 지 얼마 안 되는 입장으로, 남한 내의 정치적 다툼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박헌영]]과 같은 [[좌파]] 정당과, 또 [[김구]]와 같은 국내파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이승만]]과 같은 해외파 독립운동가들은 서로를 불신하였고, 그 결과 남한은 여러 개의 [[정당]]이 난립되는 등 심각한 정치 사회적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김규식]] 등은 좌우파의 합작과 협력을 추진해왔고 양자를 중재해보기 위해 한 차례 [[평양]]을 방문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여기에 [[장덕수]] 암살 사건으로 [[이승만]]과 사이가 틀어진 [[김구]]가 동참하여 힘을 얻는듯 했으나, [[김일성]]이나 [[이승만]]이나 모두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 '''허황된 북진통일론''' =====
김일성에게 적극적인 군사력 지원을 제공한 소련과 달리 미국은 이승만이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 결과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에 비해 매우 취약한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론을 주장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 금방 함락될 정도로 군사력이 취약했던 것을 보면 분명히 실현가능성이 없는 공상일 뿐이었으나, 북한은 이를 전쟁의 빌미로 이용하려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일본 공산당 =====
 
* '''일본 공산당'''
[[1950년]] [[5월]] [[코민포름]]이 [[일본공산당]]의 온건노선을 비판하자, 일본공산당 도구사 서기장은 노동절을 기하여 일본공산당은 1950년 테제인 다가오는 혁명에 있어서 일본공산당의 기본임무를 채택할 것이라고 선언하였고 전투적 공산당으로 변모하였다. 일본공산당은 5월 30일 궁성앞 인민광장에서 2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한 "공산당 방위, 평화옹호, 요구관철, 조선통일전선 인민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 [[조총련]]의 행동대, 학생, 조직노조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집회 후 도심지로 진출하여 시위를 벌여 미군 헌병과 충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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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군]]이 침입한 횟수는 432회에 이르고, 그 가운데에 71회는 [[비행기]] 침입, 42회는 [[군함|함대]]습격도 포함 되어 있었다. 충돌은 [[황해도]] 옹진 반도에서 [[강원도]]의 [[양양군|양양]]까지 걸쳐져 있어 단순한 국부적 충돌이 아닌 '작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셈이었다. 그 가운데 옹진 반도, [[송악산 5·4 전투|개성]], [[의정부시|의정부]], [[춘천시|춘천]] 그리고 [[강릉시|강릉]]부근에서 [[전투]]가 자주 벌어졌다. 이 지역들은 [[1950년]] [[6월 25일]]에 [[조선인민군]]이 주 공격지역으로 삼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은 전국을 통틀어 비행기는 고작 15대였으며 그것도 분계선이 아닌 호남지방에 있었다. 또한 함대는 1척도 보유하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민군이 선제공격했다는 당시의 목격담도 끊이지 않았다.<ref> 임영태, 《[[인류 이야기 현대편]] 2권》(아이필드 출판사 2004년) 124~128쪽</ref>
 
=== 원인 ===
==== 김일성의 남침 ====
[[File:6.25 전쟁 시 한복 여성.jpg|right|thumb|230px|한국 전쟁 당시 입대하는 장정을 마중나온 여성 (대구)]]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의지로 발발했으며, 구 [[소비에트 연방|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과 [[중화인민공화국]]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일으킨 남침이며, 이 설명은 [[대한민국]]과 [[미국]]의 기록, 공개된 구 소련의 비밀문서를 통해 그 타당성과 객관성이 증명되었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남한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ref name="donga">[http://www.donga.com/fbin/output?f=total&n=200807040180&top20=1 “60년대 마오쩌둥이 남한 무장봉기 강요” ], [[동아일보]]</ref>
[[김일성]]은 [[남조선로동당]]총책이었던 [[박헌영]]의 말을 믿고, [[조선 인민군]]의 남침시 이에 호응하는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 압도적인 화력으로 미국이 참전하기전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점령하면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수 있다고 믿었다.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에게 미국이 전쟁에 관여하지 않을것이란 점과 단기간에 전쟁을 끝낼수 있다는 점을 들어 스탈린을 설득했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ref name="stalin_accept">[http://news.kbs.co.kr/tvnews/news9/2010/06/24/2118018.html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ref>
미국과의 직접적인 교전을 피하고 싶었던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 약속을 요구하고,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지원 약속을 받아낸다. [[소련공산당]]의 [[니키타 흐루쇼프]] 전(前)서기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의 계획과 스탈린의 승인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밝혔으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1996년]] [[7월]]에 한국 전쟁의 기록을 남한의 북침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수정하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하였다.<ref name="donga">[http://www.donga.com/fbin/output?f=total&n=200807040180&top20=1 “60년대 마오쩌둥이 남한 무장봉기 강요” ], [[동아일보]]</ref>
 
미국결국 구 소련 비밀문서의 공개에 따라 남침은 [[CIA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것도 김일성이라는 것이 밝혀져 내란확전설, 이승만 주도설 등은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ref>[http://www.kwp.org/html/kdata/zveda.htm Stalin, Kim Il Sung, and the 38th Parallel]</ref> 그리고 CIA는 한국 전쟁 발발 엿새전의 보고서에서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하고 있었고 북한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는없다는 것을 근거로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하고 있었다했다. 그러나 CIA의 예측과는 달리 한국 전쟁 발발하자 백악관은 그 책임을 물어 CIA를 전쟁 발발후 며칠간 백악관 안보회의에서 배제했고 두 달 뒤에는 CIA의 수장을 교체했다.<ref name="cia_mistake">[http://news.kbs.co.kr/world/2010/06/16/2113578.html#// CIA 한국전 잇단 오판, 수장까지 교체], KBS, 2010.06.16. </ref>
<ref name="cia_mistake">[http://news.kbs.co.kr/world/2010/06/16/2113578.html#// CIA 한국전 잇단 오판, 수장까지 교체], KBS, 2010.06.16. </ref>
 
반공주의자인 미국의 덜레스 장관이 남한을 방문하는 사건 등 미국의 북침에 대한 위협을 느낀 김일성이 남침을 결정했다는 주장도 있다. <ref name="donga" />
[[파일:Russia-attack-to-southkorea-plan.jpg|thumb|300px|left|[[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파일:Russia-attack-to-southkorea-plan.jpg|thumb|left|[[전쟁기념관]]에서 전시 중인 [[러시아어]]로 된 남침작전 계획서]]
비교적 폐쇄적인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북한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북한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입장으로 고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비교적 폐쇄적인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 참전자 증언, 구 소련의 공개된 문서를 고려할 때, 북한이 주장하는 이승만 북침설은 설득력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전 북한의 주장인 북침설을 공식입장으로 고수하였으나, 최근의 경제개방과 대한민국과의 수교 이후 남침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소련]]의 붕괴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한국 전쟁 관련 비밀 문서가 공개된 이후, 한국 전쟁의 원인은 [[남조선로동당]] [[박헌영]]의 설득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이 대규모의 남한 침입을 계획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재가를 얻어 개시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재가를 무려 48번이나 거절하고 전방 위주의 게릴라전만 허용했지만 김일성의 강력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서 결국 스탈린은 남침을 승인하고 말았다.<ref name="stalin_accept">[http://news.kbs.co.kr/tvnews/news9/2010/06/24/2118018.html 소련, “남침 준비 부족, 게릴라전 주력하라”], [[KBS]]</ref> 미국의 [[사회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따르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스탈린이 훨씬 더 깊이 개입해 있었다고 한다. [[영국]] 정보기관에서 나온 문건에 따르면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은 대한민국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
다음은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 제기된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이론이다.
 
=== 과거의 한국전쟁 원인 가설 ===
* 스탈린 주도설
 
[[북한]]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견해, 남침이라는 견해, 쌍방 책임론,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 이라는 평가 등이 엇갈리고 있다. [[대한민국]] 중심 시각으로는 군병력과 경찰병력의 휴가일을 이용한 [[북한]]의 무력 도발행위이자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고, 공산주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한 전쟁이라 평가하고 있다. 다음은 대한민국과 미국을 비롯한 국가들에서 제기된 한국전쟁에 대한 여러 이론이다.
 
==== 스탈린 주도설 ====
한국 전쟁이 김일성이 아니라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의지로 발발했다는 설이다. 그 이유로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압력을 극동으로 분산, 미일평화조약의 견제, 미국의 위신을 떨어트리고 아시아 지역의 공산화를 촉진하기 위한 무력 시위, [[중국공산당]]의 독자 노선에 대한 견제 등의 이유로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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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탈린 주도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스탈린]]은 [[미국]]과의 갈등을 걱정하여 [[한국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였으며, 한국전쟁에 적극적인 입장을 보인 사람은 [[김일성]]이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무려 48번이나 한국전쟁을 발발시켜달라는 재가를 요구했다. 김일성의 요구를 스탈린은 48번씩이나 거절했지만 김일성의 강한 의지를 꺾을 수 없어 결국 [[전쟁]]을 승인하고 만다. <ref name="stalin_accept" />
 
*==== 한미 공모설 ====
[[이승만]]의 [[제1공화국]]의 북진 통일론이 대남 도발을 촉진시켰다는 설이다. 이승만은 여러 차례 무력 북진 통일을 부르짖었으며, [[미국]]의 군사 원조를 공공연히 요청한 바 있다. 실제로 [[1950년대]] 초부터 남북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증강시키기 시작했고, 미국이 국군을 강화시키면 이승만이 무력통일을 추구할 것이라고 판단, 북한이 예방적 조치를 취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한미공모설은 위 항목에 관련된 구 소련의 문서공개로, 제시된 적 있는 가설로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56년만에 공개된 CIA 극비 문서에서 한국 전쟁 발발 불과 엿새전인 6월 19일, 북한의 남침가능성이 낮게 평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고 북한이 소련의 철저한 위성국가로 독자적인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다고 보고 있었다.<ref name="cia_mistake" />
 
*==== 내란 확전설 ====
한국 전쟁은 [[6월 2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기간을 포함해야 한다는 설이다. 1950년 이전부터 이미 정치적, 이념적 대립에 따른 국지적 무력 충돌이 수십 차례 계속되었으며 그것이 확대되어 한국 전쟁이 되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이미 수많은 국지전과 무력 충돌이 있었으며, [[1950년]] [[6월 25일]]에도 사람들은 기존의 국지전의 연장으로 인식하여 피난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 따르면 전쟁 기간은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 작은 전쟁( ~ [[1950년]] 6월 25일) : 38선 부근에서의 국지적 무력 충돌이 계속됨.
# 제한 전쟁(1950년 6월 25일 ~ [[1950년]] [[7월 1일]]) : 북한이 대규모 무력 동원을 통해 대한민국(남한)의 수도 서울을 전격 침탈하여 불법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 함.
# 전면 전쟁([[1950년]] [[7월 1일]] ~ [[1950년]] [[10월]]) :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대대규모의 미군 스미스 부대가스미스부대가 참전, 북한은 [[7월 1일]]부로 전시국가총동원령을 발령함.
# 확대 전쟁(1950년 10월 ~ 1951년 [[6월]]) :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후 UN연합군은 서울을 수복함. 이후 항복을 재차 권고했으나 대답이 없어, 국군이 최초로 [[38선]]을 넘어 북진 시작, 곧 국제연합군(UN군)도 진격시작, 평양수복, 압록강까지 진격했으나, [[중국 인민해방군|중국인민군중공군]] 참전으로 이어짐.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듦.
# 고착 전쟁([[1951년]] [[6월]] ~ ) : 중국군의중공군의 2차례에 걸친 춘계공세를 연합군이막아내고 연합군의 막강한 방어하고,화력에 이후당황한 공산측이 정전협정을 받아들임.
 
[[북한]] 위주이거나 북한을 중심으로 평가하려는 시각에 의하면 [[북한]]이 중심이 된 인민해방전쟁이라는 평가와 함께 북침이라는 주장, [[미국]] 등 외국의 개입으로 실패한 해방전쟁이라는 평가도 있다.
 
기타 양시양비론적 성격으로 쌍방책임론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 전쟁준비 ==
=== 조·소 비밀회담 ===
소련은 1948년 12월 북한에서 철수하였고 소련 정부는 모스크바에서 군수뇌회담을 개최하여 철군이후의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특별군사사절단'을 통해서 집행하기로 하였다. 이회의에는 북한과 중국의중공의 고위 군부 대표도 참석하였다. 모스크바 계획이라고 불리는 전쟁준비 계획은 만주에 있던 조선인 의용군 부대로 북한으로 귀국시켜 5개 사단을 갖게하고 이외에 8개의 전방사단과 우수한 장비를 보유한 8개의 예비사단, 그리고 500대의 탱크를 보유하는 2개의 기갑사단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1949년 2월 스탈린은 북한정권 수립후 처음으로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소련군의 철수로 인한 군사력공백과 한반도 정세를 논의하였다. 북한의 수뇌부는 방문기간인 3월 17일에 유럽에서 일반적으로 체결하던 '우호 방위조약'이 아닌 '조·소 경제·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는 앞으로 있을 한국전쟁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한 계획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ref>Max Beloff, ''Soviet Foreign Policy In the Far East, London : Oxford University Press'', 1952, pp.177</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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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북한은 주민들이 초가지붕을 고칠 여유도 주지 않음은 물론이고 당시 남한에 전혀 전무했던 [[T-34/85]]를 확보해놓기까지 했으며 특히 일제시대에 닦아놓았던 도로의 폭을 2배 이상 넓혀 놓기까지 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반면 남한에서는 한국전쟁 하루 전날 [[병사 (군인 계급)|병]]<ref>[[대한민국 국군]]에서는 [[병]]이라 한다.</ref>들에게 휴가를 보내는 등 아주 허술하게 대응했다.<ref>[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2/17/3628371.html?cloc=nnc 6·25 전쟁 60년: 임진강을 넘어온 적 (37) 평양서 발견한 전쟁 준비 문서], 《[[중앙일보]]》, 2010년 02월 17일</ref>
 
== 진행 과정경과 ==
 
=== 남·북한 군사력 비교경위 ===
 
{|class="wikitable" align="right"
|+'''남북한 군사력 비교(1950년 기준)'''
!항목!!대한민국 !! 조선민주주의</br>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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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발 ===
[[파일:T-34-85-korea.jpg|thumb|300pxleft|왜관([[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에서왜관읍)에서 미군이 버려진 [[T-34|T-34/85]] 전차를85를 살펴보고 있다. [[T-34]]는/85는 공산국가의 맹주격인 [[소비에트 연방|소련]]에서 대량으로 제작하여 여러 공산국가에 뿌린 관계로 당시 여러북한 뿐만 공산권아니라 국가들의공산계의 주력전차였다]]
[[파일:1950-northkorea-infantry-arms.jpg|thumb|left|개전 초기 북한군 보병의 기본 화기]]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공격해 왔다. 단 한 대의 [[탱크|전차]]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대한민국|한국]](남한)군은 인민군에게 밀려 후퇴하였다. 이전부터 [[38선]] 부근에서의 소규모 충돌이 많았기 때문에 [[대한민국|남한]] 국민들은 많이 놀라지 않았으나, 잠시 뒤 군용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3군 장병들은 빨리 원대로 복귀하라"는 마이크 소리가 요란해지면서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지만 무슨 일인지 알 길은 없었다. 오전 7시가 넘어서야 방송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군이 침공해 왔다는 소식만 간단히 전하고 "장병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빨리 원대복귀하라"는 공지방송만 반복하고 있었다. <ref>{{서적 인용 |인용문=이전부터 38선~반복하고 있었다. |저자=노정팔 |제목=한국방송과 50년 |꺾쇠표 = 예|출판사=나남 |발행년도=[[1995년]]|쪽=159~16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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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6일]] 밤 10시 반경 [[이승만]]은 [[도쿄]]에 있는 [[미국]]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ref>{{서적 인용 |인용문=[[1950년]] [[6월 26일]]~도움을 요청하였다.|저자=[[이한우]]|제목=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 하(下)|꺾쇠표 = 예| 출판사=[[조선일보사]]|발행년도=[[1996년]]|쪽=78~79}}</ref> 그 직후, [[이승만]]은 한국 전쟁 시기에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을 실추시킨 행동을 보여 주었다.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로 [[서울특별시|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방송을 통해, 서울 시민들이 서울 안에 그대로 머무르도록 독려한 반면 그 자신은 방송 진행중에 각료들과 함께 특별열차로 [[대전광역시|대전]]으로 피신하는 중이었다. [[이승만]]은 [[대전광역시|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광역시|대전]]을 떠나 [[익산시|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시|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광역시|대구]]로 옮겨갔다. [[한강]]의 다리를 폭파하라는 그의 지시로 수많은 시민들이 공산주의 통치를 피할 수 없었다.
 
[[파일:Americanexecuted1950korea.jpg|thumb|처형된 미군]]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특별시|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광역시|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광역시|대전]]으로 내려갔다. <ref>{{서적 인용 |인용문=[[1950년]] [[6월 27일]]~[[대전]]으로 내려갔다. |저자=강준만 |제목=앞의 책 |쪽=51}}</ref>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시|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광역시|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광역시|대전]]을 떠나 [[익산시|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시|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광역시|대구]]로 옮겨갔다.<ref>{{서적 인용|인용문=[[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정식으로 의결되었다.|저자=전쟁기념사업회|제목=《한국전쟁》 제3권 |꺾쇠표 = 예 |출판사=행림출판|발행년도=[[1992년]]|쪽=39}}</ref>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시|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ref>{{서적 인용|인용문=[[6월 27일]] 아침 6시에~|저자=노정팔|제목=앞의 책|쪽=161~162}}</ref> [[서울특별시|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군이 [[미아리고개|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특별시|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광역시|대전]]으로 옮겼다. [[6월 27일]] [[보도연맹 사건|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이 집행됐다. 이 처형은 이승만이 명령한 것으로 알려졌다.<ref>[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607.html 60년 만에 만나는 한국의 신들러들]<br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0451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민간인 처형 집행했던 헌병대 간부 최초증언 출처 :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 오마이뉴스]</ref>
[[파일:South Korean soldiers walk among dead political prisoners, Taejon, South Korea.jpg|thumb|[[보도연맹 사건]]]]
 
[[6월 27일]] 새벽 2시에 [[이승만]]은 [[서울특별시|서울]] 시민들을 버리고 [[대전광역시|대전]]행 특별 열차를 타고 [[대전광역시|대전]]으로 내려갔다. <ref>{{서적 인용 |인용문=[[1950년]] [[6월 27일]]~[[대전]]으로 내려갔다. |저자=강준만 |제목=앞의 책 |쪽=51}}</ref> [[6월 27일]] 새벽 4시에 열린 비상 [[국무회의]]에서 정부의 [[수원시|수원]] 천도가 정식으로 의결되었다. [[이승만]]은 [[대전광역시|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광역시|대전]]을 떠나 [[익산시|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시|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광역시|대구]]로 옮겨갔다.<ref>{{서적 인용|인용문=[[1950년]] [[6월 27일]] 새벽 4시에~정식으로 의결되었다.|저자=전쟁기념사업회|제목=《한국전쟁》 제3권 |꺾쇠표 = 예 |출판사=행림출판|발행년도=[[1992년]]|쪽=39}}</ref> [[6월 27일]] 아침 6시에 서울중앙방송은 [[수원시|수원]] 천도 소식을 전했으나, 이를 취소하라는 압력으로 취소 방송이 있었다. <ref>{{서적 인용|인용문=[[6월 27일]] 아침 6시에~|저자=노정팔|제목=앞의 책|쪽=161~162}}</ref> [[서울특별시|서울]] 시민들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군이 [[미아리고개|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서울 시민들은 대피하기 시작했다. [[6월 27일]] 저녁에 [[서울특별시|서울]] 근교까지 밀어닥친 [[인민군]]들과 육박전을 감행했으나, 워낙 전세가 불리하여 [[대한민국]](남한)은 정부를 [[대전광역시|대전]]으로 옮겼다. [[6월 27일]] [[보도연맹 사건|보도연맹]]원에 대한 처형이 집행됐다. 이 처형은 이승만이 명령한 것으로 알려졌다.<ref>[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607.html 60년 만에 만나는 한국의 신들러들]<br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0451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민간인 처형 집행했던 헌병대 간부 최초증언 출처 :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 오마이뉴스]</ref>
[[파일:1950-northkorea-infantry-arms.jpg|thumb|300px|left| [[전쟁기념관|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개전 초기 북한군 보병의 기본 화기]]
[[파일:1950-southkorea-infantry-arms.jpg|300px|thumb|left| 한국전쟁 초기,한국군 보병의 기본 화기]]
 
[[파일:1950-southkorea-infantry-arms.jpg|thumb|한국전쟁 초기, 남한군 보병의 기본 화기]]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경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에 단 하나뿐인 다리였던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이 폭파로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지고 최소한 500명이 폭사하였다. <ref>{{서적 인용|저자=김동춘 |제목=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꺾쇠표 = 예 |출판사=돌베개|발행년도=[[2000년]]|쪽=91}}</ref>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정부의 이 같은 실책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에([[8월 28일]])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은 12년 만에 재심을 거쳐 [[1962년]] 무죄 판정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 <ref>{{서적 인용|인용문=당시의 전황으로~|저자=이한우|제목=앞의 책|쪽=84}}</ref> 한강 철교의 폭파는 [[신성모]]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 (1900년)|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ref>백사 이윤영 회고록 제I편 171~172쪽</ref> 한강 철교의 폭파로 국민들은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고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넘어 [[부산광역시|부산]], [[포항시|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광역시|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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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군의 참전 ===
[[파일:Korean war 1950-1953.gif|thumb|230px|[[1950년]]부터 [[1953년]]간의 한국전쟁의 경과]]
 
한편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일어나자 [[한미관계|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서기관 [[한표욱]]에게 긴급 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부]]에 사태의 긴급성을 알렸고, [[6월 26일]]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백악관]]으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을 방문, 미군의 [[한국]] 파병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국제 연합|유엔]]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를 열어 한국 문제를 건의했다. 이에 따라 [[UN 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6일]] 오전 4시에 소집되었고,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북한군의 즉각적인 전투 행위 중지와 [[38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요청하는 [[국제 연합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82호|결의안]]을 9대 0으로 가결하였다.([[유고슬라비아]]는 기권) <ref>{{서적 인용 |인용문=이에 따라~(유고슬라비아는 기권) |저자=이기택 |제목=국제정치사 |꺾쇠표 = 예 |출판사=일신사|발행년도=[[2000년]] |쪽=471~472}}</ref>
 
[[파일:Chang Myon 194804'.png|thumb|left|210px|[[장면]], 주미한국대사<br />(그는 미국과 UN에 대한민국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여 개입을 성사시킨다.]]‎
 
같은 날 주미한국대사 [[장면]]은 미국 상, 하원의원들을 찾아다니며 한국에 파병해줄 것을 호소하였고, 결국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프랑스]], [[콜롬비아]], [[터키]] 등 16개국의 회원국이 유엔군을 조직하여 한국전에 참전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대전까지 들어온 인민군이 진로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호남, 경북 왜관(낙동강), 영천, 포항 등지로 육박하자, [[대전]]에서 [[대구]]로 내려와 있던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한국군을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지휘 하에 편입, 대폭 증강하여 [[낙동강]]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삼고 반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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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발발 15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인 7월 10일, [[장면]]은 "38선은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한국의 해방과 통일은 필수적"이라고 주장하였다. <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The United States Representative at the United Nations (Austin) to the Secretary of State |인용문=He said that 38th parellel was meaningless and that liberation and unification of all of Korea was essential, after which there should be UN supervised elections for whole country. |작품명=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54 }}</ref> 7월 13일, 이승만은 미국 CBS와의 인터뷰에서 "북한군의 행동은 38선을 제거시켜 주었고, 38선에 의한 분단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와 질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다.", <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Memorandum by the Director of the Office of Northeast Asian Affairs (Allison) to the Assistant Secretary of State for Far Eastern Affairs (Rusk) |인용문=...the action of the North Korean forces had obliterated the 38th parallel and that no peace and order could be maintained in Korea as long as the division at the 38th parallel remained. |작품명=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73 }}</ref> "침략자를 격퇴하는 데 있어 한국군은 결코 38선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ref>{{웹 인용 |url = http://images.library.wisc.edu/FRUS/EFacs2/1950v07/reference/frus.frus1950v07.i0009.pdf | 제목 =The Secretary of State to the Embassy in Korea |인용문=16. Press report June [July] 13 quotes Pres Rhee as voicing determination ROK not to stop at 38th parallel in repelling invaders. |작품명=FRUS 1950 Vol. VII Korea |출판사=[[미국 국무부]] |쪽=387 }}</ref> 이승만의 이 언명은 미국을 크게 놀라게 하여 [[딘 애치슨]]으로 하여금 주한 미국대사 [[존 무초]]에게 그러한 언명을 모든 것을 다해 어떻게든 막으라는 전문을 화급히 치도록 했다. 미국은 38선에서 정지할 것이며 북한군을 그렇게 하였듯이 남한군을 그곳에서 막을 것이라는 미군의 성명도 발표되었다. 그러나 무초에 따르면 그는 노 정객 이승만의 입을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따르면 한국민들은 전전부터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국부의 몰락 이후 깊은 절망에 빠져들어 우리는 어떻게 공산주의자들을 저지할 것인가 걱정하고 있었다. <ref>{{웹 인용 |url = http://www.trumanlibrary.org/oralhist/muccio1.htm |제목= Oral History Interview with John J. Muccio |출판사= Harry S. Truman Library }}</ref> 장면과 이승만의 언명 속에서 대한민국의 리더십이 6월 25일의 침략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을 시점부터 이미 통일의 호기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ref>{{서적 인용 |저자=[[박명림]] |제목=한국 1950 전쟁과 평화 |발행년도=2002|출판사=나남|출판위치=서울 |id=ISBN 89-300-3939-1 |페이지=552쪽|꺾쇠표=예}}</ref>
 
스미스 부대의 패전 이후, [[미군]]은 [[윌리엄 F. 딘]] 소장이 이끄는 육군 24사단을 대전에 투입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적의 선봉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여 방어선을 구축하겠다고 장담했으나, 미 육군 24사단도 [[T-34]]에 대적할 화기가 없었다. [[대전]]을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은 [[군인]]들의 숫자도 많았고, 사기가 높아 T-34를 앞세워 미 육군 24사단을 공격했다. 계속된 [[인민군]]의 공격에 상당한 손실을 내던 대전의 미 육군 24사단은 마침내 [[7월 20일]] 패주하고 말았다. 사방에서는 압도적인 숫자의 조선인민군이 밀려왔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가운데 미 육군 24사단은 무질서하게 후퇴했다. 제24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은 함께 후퇴하던 부상병에게 먹일 [[물]]을 구하던 중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었다가 인민군에 의해 포로로 붙잡혔다. 한편, [[대한민국]]은 [[대전]]을 빼앗기고 난 다음에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수도로 정했다. 그러나, 이 무렵 [[한국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었다. 그리고그러나 인천 상륙 작전이 시행 됨에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까지 전진하였다.
 
==== 대구 후퇴와 다부동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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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에서의 설득 작업 ====
그러나 [[소련]]과 [[중국]] 측은 6.25 전쟁이 남한의 선제 공격으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8월 1일, 안보 이사회의 8월 의장국이었던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이사회에 출석했다.<ref name="회고록113">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3페이지</ref> 의장석에 앉은 소련 측 대표 말리크는 그 동안의 한국 사태에 대한 안보리의 모든 결의가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안보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인 소련과, 또 상임 이사국으로서 당연히 참석해야 할 중국중공 대표가 없는 동안에 통과된 결의안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다”<ref name="회고록113"/>고 주장하였다.
 
[[파일:John Myun Chang.jpg|썸네일|왼쪽|230px|UN 회의에 참석, [[소련]] 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장면 대표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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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대표는 9월에 열린 UN 안보리 이사회에도 참석하는데, 9월 안보리 의장국은 [[영국]]이었다. 9월 1일, 글랜드윈 접 영국 측 대표가 안보 이사회의 사회를 맡자 [[장면]]은 착석과 발언권을 달라고 미리 요구했다. 의장은 “당사국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장 대사에게 착석을 허한다”고 선언하<ref name="회고록114">장면,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9 증보판) 113페이지</ref>여 장면 대표는 무난히 착석하였다. 의장으로부터 발언권을 얻은 장면 대표는 “그 동안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나는 할 말을 못하고 참아 왔다”고 말문을 열어 소련을 공박하였다.<ref name="회고록114"/> 소련 대표 말리크는 “규칙 발언!”이라며 그의 발언을 제지하려 들었다. 이어 말리크는 그에게 “도대체 저 자가 누군데 무슨 자격으로 저 자리에 감히 앉아서 발언을 하는 것이냐?”며 “저 자는 이승만 도당의 괴뢰”라고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장면은 말리크의 욕설에 대해 취소하라고 항변하였다.<ref name="회고록114"/>
 
{{인용문|대한민국에는 이승만 도당이라는 것은 없고 나는 헌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이 자리에 의장의 초청으로 착석했노라.<ref name="회고록"/> {{Rp|115}}}}
 
그는 약 40여 분간 공산권의 “남한의 북침” 주장과 “한국민들끼리의 내란”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는 연설을 했고, 이는 국제사회에 생방송으로 중계되었다.
 
===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 ===
[[파일:Battle of Inchon.png|thumb|300px200px|[[인천]]에 상륙하는 [[유엔군]]]]
{{본문|인천 상륙 작전}}
 
[[파일:IncheonLandingMcArthur.jpg|thumb|300px|left|UN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관찰하다.]]
[[파일:압록강에서 물을 수통에 담고있는 6사단 7연대 병사.jpg|thumb|200px|[[1950년]] [[10월 26일]]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고있는 [[6사단]] 7연대 병]]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다.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다.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이어 제2단계로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다. 그 후 서울을 빼앗긴 지 3개월 만인 [[9월 28일]]에 서울을 되찾았다. 이어 달아나는 인민군을 뒤쫓아 38선을 돌파하여 [[10월 10일]]에는 [[원산]]을, [[10월 19일]]에는 [[평양]]를 점령했다. 이어, [[10월 26일]]에는 서부는 [[청천강]] 북부와 [[압록강]]의 [[초산]]에 이르렀고, 중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으며, 동부는 [[압록강]]의 [[혜산진]]까지 진격했다. 또한 11월에는 [[두만강]] 일대까지 진격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정부와 인민군을 미리 [[10월 9일]]에 북쪽으로 거의 모두 철수시킨 다음에 [[10월 12일]]부터 [[평양]]에서 철수했다. 북한은 지금의 자강도의 중심지인 [[강계]]를 임시수도로 정했다(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했을 때 [[미국 1 해병사단]]의 목표가 바로 북한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는 것이었는데, 이를 시도하다가 중국군의중공군의 의해 밀린다). <ref>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uYb&articleno=15609403&categoryId=676688&regdt=20100624220413#ajax_history_home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중공군 개입과 휴전 협정 (2)] </ref>
 
=== 중국의중공의 참전과 1.4 후퇴 ===
{{본문|1·4 후퇴}}
[[파일:ChineseKoreanWarPoster.jpg|thumb|중공군이 한국에서 이룬 "승리"를 보여주는 중국의 포스터]]
{{참조|온정리 전투|장진호 전투|평양 철수|임시 수도 강계}}
[[한국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공의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리고 중공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공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공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대만도 [[중화민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국땅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공, 북한 등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중국인민해방군|인민해방군]](중공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어느 곳에서는 53만 명이상이라 기록하기도 한다.)
[[파일:ChineseKoreanWarPoster.jpg|thumb|중국군이 한국에서 이룬 "승리"를 보여주는 중국의 포스터]]
[[한국군]]에 의한 무력 통일을 눈 앞에 두었을 때 북한의 김일성은 불안하여 중국의 마오쩌둥을 만났다. 그리고 중국의 마오쩌둥은 미국이 북한을 이기면 머지않아 바로 중국도 공격할 것이고, 미국이 중국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대만도 [[중화민국]] 통일을 위해, 쳐들어올 거라는 추측으로 인해 결국, 마오쩌둥은 한국땅에서 미국과 싸워서 중국, 북한 등의 공산주의 혁명을 지켜야 되는 목표를 삼았었다.
 
그리고 중공이 개입할 당시, 소련이 중공에게 많은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전투기들도 중공 마크를 달고 쳐들어오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넘치는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 중공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중국인민해방군|인민해방군]](중국군)이 사단급의 병력으로 전쟁에 개입하여 반격해 왔다. 당시 중국은 내전이 갓 끝난 상황으로, 대부분의 인민이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시기였으므로 참전자가 매우 많았다. (어느 곳에서는 53만 명이상이라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12월 4일]]에 평양철수를 하고 이어 북한은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한편, [[12월 9일]]부터는 [[UN]]군이 [[원산]]을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한국군 [[국민방위군]] 9만명이 간부의 횡령에 의해서 아사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0623016 '국민방위군' 희생자 56년만에 '순직' 인정)</ref>
그리고 중국이 개입할 당시, 소련이 중국에게 많은 무기를 보내줬고, 소련군이 몰고 있는 전투기들도 중국 마크를 달고 쳐들어오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넘치는 의용군을 바탕으로 중국군이 [[인해전술]]로 공격해왔다. 중국군은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주로 야간 이동을 하고, 요란한 악기 소리를 동원해 어둠을 틈 타 기습하는 등 지형지물을 정교하게 이용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ref>이승만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ref> [[2월]] 이승만은 38선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중공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이러한 예상치 못한 반격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중국군과 [[온정리 전투]]와 [[장진호 전투]]를 치르고 [[청천강 전투]]를 벌였지만 38도선 이북에서의 대대적인 철수를 계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은 [[12월 4일]]에 평양철수를 하고 이어 북한은 [[12월 6일]]에 수도 [[평양]]을 되찾았다. 한편, [[12월 9일]]부터는 [[UN]]군이 [[원산]]을 철수하였고, [[12월 14일]]부터 24일 사이에 동부 전선의 한국군 12만 명과 피난민 10만 명이 [[흥남]] 부두에서 해상으로 철수했고,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1월 7일]]에는 [[수원]]이 함락되었다. 한국군 [[국민방위군]] 9만명이 간부의 횡령에 의해서 아사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0623016 '국민방위군' 희생자 56년만에 '순직' 인정)</ref>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서울 바로 위에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옆으로 일렬로 서 있었고, 동부(강원도 쪽)에서 북한과 중공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공, 북한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소련이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중국군은 계속 남진했으나, 한국군은 이미 병력과 장비를 정비하여 반격 태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ref>이승만은 철저한 반일주의자였다.</ref> [[2월]] 이승만은 38선은 북한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중국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한편, 서울 바로 위에는 중국군과 북한군이 옆으로 일렬로 서 있었고, 동부(강원도 쪽)에서 북한과 중국이 강릉까지 밀고 내려오자, 유엔군은 이 전선을 지원방어하였고, 좀 지나자, 유엔군은 전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 북한군이 뒤로 크게 밀려, 유엔군은 38선을 넘었고 유엔군은 방어선을 쳤다. 바로 이것이 지금의 휴전선이다. 하지만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소련이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전하였다. 이제부터 한국전쟁은 국제전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 휴전 협정 ===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정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정전 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국군중공군 철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무장해제, [[국제연합|유엔]] 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 의제에 합의하였다.
 
한국 전쟁 중 2년 동안 이렇다 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중공]]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중국을중공을 부담스러워한 [[미국]]은 현상유지 차원에서 휴전협정을 추진하였다. 소련의 부분적으로 참전하자, 세계 여러나라들은 한국 전쟁이 머지않아 냉전체제와 한국의 통일을 위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거라는 가능성이 커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과 중국군은중공군은 얼른 이 한국전쟁을 중단하고, 정전을 하기로 했었다.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소련]] 및 [[중화인민공화국|중국중공]] 측과 휴전을 논의한다. [[1952년]] 3월 [[이승만]]은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ref>{{뉴스 인용 |url=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6/08/14/200608140500031/200608140500031_1.html |제목=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작품명=신동아 |출판사= 동아일보사 | 작성일자 = [[2006년]] [[8월 1일]]}}</ref>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고집하며 휴전에 협조하지 않았다.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을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나중에 중국군의중공군의 반격으로 서울을 뺏기고 남하했지만 다시 수복하고 38선 넘어 공산군을 쫓아낸 뒤 현재의 휴전선이 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정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그리고 또한, [[1953년]] [[3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그 배경은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 참조''), [[1953년]] [[3월 19일]] [[소비에트 연방|소련]] 내각은 '한국 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ref>{{서적 인용|인용문=군사분계선 문제는~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저자=온창일|제목=〈한국전쟁과 한미상호방위조약〉}}</ref><ref>{{서적 인용|편집자=한국전쟁연구회|제목=탈냉전시대 한국전쟁의 재조명 |꺾쇠표 = 예|출판사=백산서당|발행년도=[[2000년]]|쪽=38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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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의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 사건|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2009년]]에는 [[대청해전]]이 발발하였다. [[2010년]]에는 [[천안함 침몰 사건]]과 [[연평도 포격|연평도 포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 망명 정부 계획 ===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ref name="야마" />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ref name="야마"/>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ref name="야마"/>
 
한편, [[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이동시켜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새로이 '신한국'을 창설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한다.<ref> KBS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참조. </ref><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042289 동남어문학회 '낙동강과 한국전쟁' 학술대회] </ref>
 
== 피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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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에 발생하였다.
 
=== 대한민국남한 ===
[[파일:Geochang massacre.jpg|thumb|[[거창 양민학살 사건]]]]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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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한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ref> {{서적 인용|인용문=한국 전쟁은 이승만이~수 있었다.|저자=김동춘|제목=앞의 책|쪽=292}} </ref>
 
그러나 한국 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 북한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전쟁 과정과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한국 전쟁의 책임을 [[박헌영]], [[김무정]] 등 자신의 정적들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숙청하여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점령지 주민에 대해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RG 153의 미군 전쟁범죄조사국(The War Crimes Branch) 문서들에서 드러났다.
 
[[공산주의]]적인 산업화 즉, [[통제경제]]에 따른 산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경제적인 상황이 1960년대 이후로 [[대한민국|남한]]과의 비교에서 매우 악화되었다. <ref>{{서적 인용|인용문=전쟁 과정에서~계기를 얻었다.|제목=같은 책|쪽=292}}</ref>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만들어 놓은 발전소·산업 시설은 전쟁 중 폭격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피해 복구를 위해 전쟁이 끝나고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소비에트 연방 루블|루블]],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는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ref>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270쪽, 한국학술정보 2008년, ISBN 978-89-534-6814-6</ref>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대규모 공업단지가 폭격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으며 한국 전쟁 직전까지 남한보다 공업이 발전한 선진국이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이러한 피해, 이후 족벌독재, 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게 되어 1970년대에는 경제가 역전되어 [[대한민국|남한]]보다 후진국이 되었다.
이런 공산권 국가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북한은 [[통제경제]]에 따른 산업화를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었고, 산업화·근대화 측면에서 일정 부분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60년대 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빠른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에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력에서 추월당했다. 1990년대 일어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뒤이은 동유럽 국가들의 민주화와 시장경제 도입은 북한 경제가 의지하던 공산권 국가들과의 교역·지원이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고, 북한 경제는 외부와 점점 차단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지원받았으며,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았다.<ref>소진철, 《한국전쟁 어떻게 일어났나》 270쪽, 한국학술정보 2008년, ISBN 978-89-534-6814-6</ref>
남한등 주변국들의 괄목할만한 성장과 경제난으로 인한 주민 통제약화는, 체제위협을 느낀 북한이 족벌독재·군사력 증강에만 집중하도록 하고있다.
 
=== 다른 참전국들미국 ===
[[파일:Hill303.png|thumb|[[:en:Hill 303 massacre|303고지 학살 사건]]]]
{{부분토막글}}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 [[미국]]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다.
 
=== 중국 ===
미국은 [[윌리엄 F. 딘]] 장군을 비롯한 상당수의 미군들이 포로로 잡혀 희생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총살된 미군의 숫자도 많았다. [[미국]]은 '''한국 전쟁'''에 가장 많은 군사를 지원하였다.
{{부분토막글}}
 
=== 기타 국가 ===
 
=== 터키 ===
[[터키]]군은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미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1만4936명을 파병하였고, 724명이 전사하였다.<ref>정철근, [http://news.joins.com/article/305/4494305.html 전쟁고아도 챙겼던 [[터키]] 노병 “한국 발전 감사” ], 중앙일보</ref>
 
== 전쟁 범죄중의 인권유린 문제 ==
=== 민간인에양민학살 대한 전쟁범죄문제 ===
한국 전쟁 중의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의 양민 학살 사건, 정치인 납북 사건, 협력자 사살 등의 문제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있다.
[[File:Shootingkoreancivilians.jpg|thumb| 비밀 해제된 미군의 한국 전쟁 중 내부 문서 <br/>
'''제목''': 피난민 공중 폭격에 관한 지침 <br/>'''수신''': 미 공군 팀버레이크 장군. [[1950년]] [[7월 25일]]. <br/>
'''2항'''. 인민군과 인민군에 동원된 많은 민간인들이 아군 진지로 침투한다는 보고가 있다.<br/>
'''3항'''. 육군은 우리측 진지로 향하는, 모든 민간인들을 공중 폭격하도록 요청했다. <br/>
'''4항'''. 공군은 지금까지 이 사안에 대해 협조해 왔다.]]
 
또한 전쟁 중 [[조선인민군]] 등에 의해 행해진 인민재판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전쟁 중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는 북한군 [[정치지도원|정치장교]]들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위협이 될만한 [[대한민국|남한]]의 거의 모든 학자, 정부 관리, 종교 지도자등을 암살·숙청했다.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은 인민군이 퇴각하는 과정에서도 계속됐다. <ref> Rummel, Rudolph J. (1997). Statistics of Democide: Genocide and Murder Since 1900. Chapter 10, Statistics Of North Korean Democide Estimates, Calculations, And Sources. ISBN 9783825840105.
[http://www.hawaii.edu/powerkills/SOD.CHAP10.HTM ]
</ref>
[[1950년]] 6월 북한의 남침 직후, 한국정부는 전국적으로 사회불만 세력이나 사상 불순자를 선제 체포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군 헌병과 우익 반공단체들이 [[대전 교도소]]에 수감된 좌익·공산주의자 정치범들과 처형하고, [[1948년]]-[[1949년]]에는 [[제주 4·3 사건|제주 양민]]들을 학살했다. <ref>[http://www.globalresearch.ca/index.php?context=va&aid=9013]
Hanley, Charles J.; Chang, Jae-Soon (18 May 2008). "Thousands Killed in 1950 by US's Korean Ally". GlobalResearch.ca. Retrieved 23 December 2011
</ref> [[제주 4·3 사건]] 당시 섬에 있던 미국인들은 이 사건을 기록하였으나, 학살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ref>[http://www.thedailybeast.com/newsweek/2000/06/18/ghosts-of-cheju.html] Ghosts Of Cheju, Newsweek. 19 June 2000</ref>
 
=== 한국군 위안부 문제 ===
당시 한국에 파견 중이던 미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Gregory Henderson)은 약 10만명의 친북 성향 정치범들이 살해되고 집단 매장됐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ref> Blum, William (2003). Killing Hope : US Military and CIA Interventions Since World War II. London: Zed Books. pp. 51–52. ISBN 9781842773680 </ref> 한국 정부의 [[대한민국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 위원회]]는 전쟁 전후로 벌어진 수 만건의 민간인 살해 기록을 수집한바 있다. <ref>
[[한국군 위안부]] 문제 역시 1990년대 이후 새로이 드러나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 한국군위안부는 북한 점령지에 있던 여성들 중 빨갱이를 도왔다는 이유로 10대~20대 여성들을 강제로 끌고가서 국군의 성노예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이들의 전재는 철저히 은폐되다가 1990년대부터 수면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http://www.jinsil.go.kr/English/Information/notice/read.asp?num=500]
Kim Dong‐choon (5 March 2010). "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of Korea: Uncovering the Hidden Korean War". www.jinsil.go.kr.
</ref>
 
그뒤 [[2002년]] 김귀옥 박사가 [[일본]] 신문에 실렸던 한국군 위안부 존재의 증거를 공식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ref>[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323/TM_0302.html <nowiki>[</nowiki>미니 인터뷰<nowiki>]</nowiki>‘한국군 위안부’문제 제기한 김귀옥 박사 :“밝혀진 건 퍼즐의 일부”] 일요시사 2002년 3월 26일 323호</ref> 또한 그해 3월에는 한국정신대연구소 강정숙 연구위원이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ref name="han010">[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1510 한국군 위안부 문제, 뇌관은 남아있다 - 오마이뉴스]</ref> 또한 한국 전쟁에 한국군 지휘관으로 출전했던 김희오 장군(예비역 소장) 역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증언하였다. 김희오의 회고록 <인간의 향기>. 34년간의 군 생활에서 한국전쟁 당시 처음 본 공개적 군 위안소 운영 사례에 대해 '영원히 찜찜한 기억'으로 기록하고 있다.<ref name="han010"/>
정규전과 더불어 인민군은 [[게릴라전]]을 전개해 연합군을 괴롭혔다. 인민군 병사들은 피난민으로 위장해 음식과 도움을 요청하는척 하며 연합군에게 접근한 뒤 숨겨진 화기를 발사하는 작전을 펼쳤다. 이러한 인민군의 게릴라 전술때문에, 미군은 자국군 진영에 접근하는 민간인 피난민들에게 '선제 발포후 심문' 원칙을 적용했다. <ref>
[http://www.washingtonpost.com/wp-dyn/content/article/2006/05/29/AR2006052900485.html]
Hanley, Charles J.; Mendoza, Martha (29 May 2006). "U.S. Policy Was to Shoot Korean Refugees". The Washington Post. Associated Press
</ref>
미군의 '선제 발포후 심문' 원칙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주민들 일부가 위장한 인민군이라고 생각한 미군들이 400여명으로 추산되는 민간인들을 사살하는 비극을 낳기도 했다.
<ref>
[http://www.japanfocus.org/-M-Mendoza/2408] Hanley, Charles J.; Mendoza, Martha (13 April 2007). "Letter reveals US intent at No Gun Ri".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 Associated Press.
</ref>
 
== 평가 ==
인민군과 한국군은 각자 그들의 전시 동원에 필요한 많은 민간인들을 강제로 차출하기도 했다. 인민군은 약 40만명의 남한 시민들을 강제 동원한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 정부는 [[1950년]] 9월 서울이 수복되기 전까지 인민군이 약 8만 3000 명의 민간인들을 납치한 것으로 보고했다. 북한측은 이들 납북자들이 자진 [[망명]]한 것으로 말한다. <ref>[http://www.nytimes.com/2007/06/25/world/asia/25iht-missing.1.6313858.html]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이 [[북한]] 정권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대한민국|남한]]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감행하였다는 남침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Choe, Sang-Hun (25 June 2007). "A half-century wait for a husband abducted by North Korea". New York Times </ref>
<ref> [http://news.bbc.co.uk/2/hi/asia-pacific/6274297.stm] "S Korea 'regrets' refugee mix-up". BBC News. 18 January 2007</ref>
 
3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거나 다치고,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되는 등 양국 모두가 큰 피해를 입었으며,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간에 서로에 대한 적대적 감정이 팽배하게 되어 [[한반도]] 분단이 더욱 고착화되면서, 지금까지도 분단 국가로 남아있다. <ref> {{뉴스 인용|제목 = "다시 보는 한국 전쟁"|url= http://pann.nate.com/video/16100770|작성일자 = 2007.09.02 19:12
==== 보도연맹 사건 ====
[[파일:South Korean soldiers walk among dead political prisoners, Taejon, South Korea.jpg|thumb|[[보도연맹 사건]], 한국군 병사들이 처형된 민간인들을 살펴보고 있다. 1950년 7월 대전 부근 ]]
 
[[이승만]] 정권은 남한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동조 세력들의 활동을 막기위해 [[공산주의자]], 친 북한세력, 또는 [[좌파]]라고 의심받는 사람들을 '국가의 반역자'라는 명목으로 '''국민 보도 연맹'''에 감금시키고, 재교육을 시켰다.
[[한국의 군정기|미군 군사 정부]]가 부추긴 반-공산주의 '''보도연맹'''(保導聯盟)의 원래 목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인민군]]의 남침을 전후로 이승만 정권이 1만 명에서 10만명에 이르는 "국가의 반역자"들을 암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암살된 사람들은 참호, 광산 또는 바다에 버려졌다. 미 군정의 장교들이 정치범 처형을 참관한 것으로 보이고, 적어도 한명의 미군 장교는 남한이 공산주의자의 손에 넘어 간다면 석방될 것이라고 의심되는 정치범들에 대한 학살을 승인했다. <ref>[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7607.html 60년 만에 만나는 한국의 신들러들]<br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0451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민간인 처형 집행했던 헌병대 간부 최초증언 출처 : "보도연맹 학살은 이승만 특명에 의한 것" - 오마이뉴스]</ref>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국민 보도 연맹원은 공식적인 통계만 해도 5천여명에 달한다. 그러나 이는 추정치의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다. 보도연맹의 사건의 생존자인 김모 씨는 "(나처럼) 죄 없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며 "억울한 것도 문제지만 연좌제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 당한 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고 탄식했다. <ref>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324987] 노컷뉴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잔혹했던 그해 여름</ref>
 
==== 양민학살 ====
{{참고|거창 양민 학살 사건|노근리 사건}}
 
[[파일:Geochang massacre.jpg|thumb|[[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희생자들]]
한국 전쟁 중의 벌어진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나 [[노근리 사건]] 등의 양민 학살 사건, 협력자 사살 등에 대한 비판이 있다.
 
==== 한강 인도교 폭파 ====
{{참조| 한강 인도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오전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한국군]]은 [[서울]] 방어를 포기하고 [[조선인민군|인민군]]의 [[한강]]이남 진격을 저지할 목적으로 [[한강 인도교 폭파|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 [[6월 27일]] 오후 11시 30분에 폭파 경고 명령이 내려졌으나, [[대한민국 국군|한국군]]은 서울 시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ref>[http://www.seoul.go.kr/life/life/culture/history_book/picture_seoul3/6/1212484_5170.html]사진으로 보는 서울III, 제 6장 다시 건설되는 서울
</ref> 폭파 당시 다리에는 약 4000명의 피난민들이 다리를 메우고 있었고, 약 500명에서 1000명 사이의 피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ref>[http://daili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280]
데일리중앙, 한강다리 폭파책임자 역사의 심판대에</ref>
[[대한민국]] 정부는 이 폭발로 800명이 숨졌다고 보고있다.
<ref name = omn070628>{{cite news
| url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19377
| title = 57년 동안 한강 떠돈 원혼들을 위로하다 '한강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제' 열려... "피난민 내팽게친 이승만은 전범" 출처 : 57년 동안 한강 떠돈 원혼들을 위로하다 - 오마이뉴스 | newspaper = [[Ohmynews]] | date = 2007-06-28 | accessdate = 2010-07-16 }}</ref>
또 [[조선인민군|인민군]]의 남하를 지연하던 한국군 [[대한민국 5보병사단|제5 보병 사단]]의 퇴로가 차단되어 사단이 해체됐다.
[[1950년]] [[9월 21일]] 최창식 대령이 폭파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처형됐다. [[1964년]] 최창식의 유족들은 폭파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 진 것이라며 고인의 무고를 주장했다.<ref name = omn070628/>
 
==== 한국군 위안부 ====
{{본문| 한국군 위안부}}
한국군은 인민군 점령지에 있던 여성들 중 공산군을 도왔다는 이유로 10대에서 20대 여성들을 끌고가 한국군 위안부에 강제 편입시켰다. 그러나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는 그동안 철저히 은폐되다가 1990년대부터 수면위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2002년]] 김귀옥 박사는 한 [[일본]] 신문에 실렸던 한국군 위안부 존재의 증거를 발표하였다.<ref>[http://www.ilyosisa.co.kr/SUNDAY/SUN_0323/TM_0302.html <nowiki>[</nowiki>미니 인터뷰<nowiki>]</nowiki>‘한국군 위안부’문제 제기한 김귀옥 박사 :“밝혀진 건 퍼즐의 일부”] 일요시사 2002년 3월 26일 323호</ref>
그해 3월에는 한국 정신대연구소 강정숙 연구위원이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글을 발표했다.<ref name="han010">[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71510 한국군 위안부 문제, 뇌관은 남아있다 - 오마이뉴스]</ref> 또한 한국 전쟁에 한국군 지휘관으로 출전했던 김희오 장군(예비역 소장) 역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증언하였다. 김희오는 그의 회고록에서 한국전쟁 당시 처음 본 군 위안소 운영을 '영원히 찜찜한 기억'으로 적고 있다.<ref name="han010"/>
 
==== 기타 ====
{{참조| 인민재판}}
전쟁 중 [[조선인민군]] 등에 의해 행해진 정치인 납북, 인민재판 문제 역시 북한 체제의 특성상 해결되지 않고 있다.
 
=== 군인·전쟁 포로에 대한 범죄 ===
{{참조|국군 포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7만 여명의 한국군을 전쟁 포로로 붙잡았다고 보고한바 있다. 이들 중 8,000여명 만이 정전협정에 따라 송환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7만 6,000명의 [[조선인민군]] 포로들을 송환했다.<ref> Lee, Sookyung (2007). "Hardly Known, Not Yet Forgotten, South Korean POWs Tell Their Story". AII POW-MIA InterNetwork.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7 October 2007. Retrieved 22 August 2007.</ref>
또한 인민군은 5만여명의 한국군 포로들을 인민군에 강제 징집한 것으로 짐작된다.<ref>Rummel, Rudolph J. (1997). Statistics of Democide: Genocide and Murder Since 1900. Chapter 10, Statistics Of North Korean Democide Estimates, Calculations, And Sources. ISBN 9783825840105.</ref>
[[대한민국 국방부]]에 따르면 [[2008년]] 현재 560여명의 한국군 포로들이 북한에 생존해 있다. [[1994년]]부터 [[2009년]]까지 약 79명의 한국군 포로들이 북한을 탈출했다. <ref>"S Korea POW celebrates escape". BBC News. 19 January 2004. Retrieved 22 December 2011.</ref>
 
미국측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민군]] 병사들은 연합군 전쟁 포로들을 폭행, 굶주림, 강제 노동, 죽음의 행진, 즉결 처분등의 방식으로 학대했다. <ref> Potter, Charles (3 December 1953). "Korean War Atrocities" (PDF). United States Senate Subcommittee on Korean War Atrocities of the Permanent Subcommittee of the Investigations of the Committee on Government Operations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Retrieved 25 December 2011.</ref>
<ref> Carlson, Lewis H (2003). Remembered Prisoners of a Forgotten War: An Oral History of Korean War POWs. St. Martin's Griffin. ISBN 0312310072. </ref>
 
인민군들은 312고지 전투, 303고지 전투, 낙동강 방어 전투, 그리고 대전 부근에서 전쟁 포로들을 처형했다.
정전 이후에 구성된 미국 상원의 한국전쟁 조사 위원회의 보고서는, "... 3분의 2 이상의 미군 포로들이 전쟁 범죄로 희생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ref>Lakshmanan, Indira A.R (1999). "Hill 303 Massacre". Retrieved 25 December 2011.</ref>
<ref>Van Zandt, James E (February 2003). "'You are about to die a horrible death'". VFW Magazine. Retrieved 25 December 2011.</ref>
<ref>Skelton, William Paul (April 2002). "American Ex-Prisoners of War" (PDF).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OCLC 77563074. Retrieved 31 December 2011.</ref>
 
[[중국인민지원군]]은 북한 인민군과 달리 포로들을 처형하는 일이 적었지만, [[1950년]]-[[1951년]] 겨울동안 중국군이 관할하는 포로 수용소에서는 많은 포로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숨졌다. 미군 포로들중 43% 가량이 이 기간동안 희생되었다. 중국군은 이 해 겨울동안 보급·지원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을 들어 포로들의 아사(餓死)가 불가피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국제 연합군 생존 포로들은 대부분의 중국군 수용소가 북-중 국경에 인접해 있었고, 보급 사정이 좋아진 뒤에도 중국군은 공산주의 이념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포로들을 대상으로 식량배급을 중단했다고 주장한다. <ref> Lech, Raymond B. (2000). Broken Soldiers.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pp. 2, 73. ISBN 0252025415.</ref>
 
==== 국민 방위군 사건 ====
{{본문|국민방위군 사건}}
[[File:국민방위군 징집자들.jpg|thumb|300px|소집된 국민 방위군, 1951년 1월]]
 
'''국민 방위군'''(國民防衛軍)은 [[중국인민지원군|중국군]]의 참전으로 병력 증편에 어려움을 겪던 [[대한민국 국군|한국군]]이 [[1950년]] 12월, 40만 6000명의 민간인들을 차출하여 만들어 졌다. [[1951년]] 겨울, [[중국인민지원군|중국군]]의 공격을 피해 남쪽으로 행군하던 국민 방위군들 중 약 9만명에서 12만명이 아사(餓死)했다. 국민 방위군 고위 장교들은 방위군에 배정된 예산을 횡령했다.
<ref>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3090854041&code=940202]
경향, 국민방위군 사건 직권조사
</ref>
<ref>
산과 들에 몰래 '매장'…60년만에 밝혀낸 진실
[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gid=523808&cid=307136&iid=252154&oid=055&aid=0000189104&ptype=011]
</ref>
 
==== 303 고지 학살 사건 ====
[[파일:Hill303.png|300px|left|thumb|[[:en:Hill 303 massacre|손이 묶인채 학살된 303 고지 학살 피해자들]]]]
 
'''[[303 고지 학살 사건]]'''은 [[1950년]] [[8월 17일]] [[경상북도]] [[칠곡군]] [[왜관]]읍 부근 303고지에서 [[부산시 부근 전투|낙동강 전투]]에서 붙잡힌 미군 [[전쟁포로]] 41명을 [[조선인민군|인민군]]이 기관총을 쏘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대구]]시 전투에 참여하던 중, 미 육군 제1 기병사단 5연대 소속 [[중대]](中隊, company) 중 일부가 [[낙동강]]을 건너 303 고지를 공격하는 [[조선인민군|인민군]] 부대에 포위당한다. 대부분의 병력이 무사히 빠져 나올수 있었지만, [[조선인민군|인민군]]을 [[대한민국국군|한국군]] 지원 부대로 잘못 식별한 [[박격포]] 한개 [[소대]]가 생포되었다. [[조선인민군|인민군]] 부대는 처음에 사로잡은 포로들을 강 건너로 이동시키려고 하였으나 미군의 반격이 심해 건널수가 없었다. 결국 인민군 선봉을 우회해서 공격하는 미군에게 방어선이 뚫리자, 후퇴하는데 짐이 되던 포로들을 기관총으로 사살한다. 학살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이후 303 고지에 세워 졌다.
 
== 영향과 사후 평가 ==
[[File:Korean peninsula at night.jpg|thumb|250px|밤에 촬영한 [[한반도]]의 [[위성 사진]] ]]
[[대한민국]]을 비롯한 [[세계]] 대부분은 [[북한]] 정권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위해서 [[38도선]] 전역에 걸쳐서 [[대한민국|남한]]에 대한 기습 침공을 감행했다는 '남침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3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남·북한 모두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숨지고 산업 시설 대부분이 파괴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은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팽배하도록 해 [[한반도]] 분단을 더욱 고착화 시켰고, 남·북한은 지금까지도 분단 국가로 남아있다.
<ref> {{뉴스 인용|제목 = "다시 보는 한국 전쟁"|url= http://pann.nate.com/video/16100770|작성일자 = 2007.09.02 19:12
}} </ref>
[[휴전협정]] 체결 당시에는 남·북한 그 어느쪽도 분단 상태가 60년이 넘도록 지속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고{{출처}}, 분단이 장기화 됨에 따라 남·북한은 [[언어]]·[[문화]]·[[사회]]적 이질성이 커지게 되었다.
 
전후 복구과정은 남과 북에서 다른 식으로 전개되었다. [[대한민국]]은 전쟁후 10여년 동안 정체되었지만, 그 뒤 산업화·현대화 되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저개발된 상태로 남아있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 초반 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고도성장을 하며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1957년]] 대한민국의 1인당 소득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물론, [[아프리카]] [[가나]]보다 낮았다. <ref>
[http://www.independent.co.uk/news/education/education-news/leading-article-africa-has-to-spend-carefully-407666.html] The Independent,Africa has to spend carefully, 13 JULY 2006 </ref>
2010년 현재, 일인당 [[구매력 평가| 구매력 평가 국내 총생산]]기준으로 [[대한민국]]은 30,200 달러로 나타나, [[가나]] (1,500 달러) 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1,900 달러)와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ref>[[일인당 구매력 평가 기준 국내 총생산순 나라 목록| 일인당 구매력 평가]]</ref>
 
중국 [[국공내전]]을 막 마치고 신생 [[중화인민공화국]]의 내부기반을 다지던 시기에, [[강대국]]인 미국을 상대로 한국전쟁에 뛰어든 [[마오쩌둥]](모택동)의 결정은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에서 '양심적' 결정이었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전쟁에 참여한 것은 북한 정권을 구하기 위한 것도, 소련을 만족시키지 위한 결정도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국제 연합|연합군]] 군대가 38도 선 이북을 넘는 순간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이 불가피 하다고 믿었다. 참전을 결정하게된 [[마오쩌둥]]의 또 다른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자신의 기여를 국제 사회에 널리 알리려는 '명예욕' 이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이 한국전쟁에 뛰어든 다음에야 비로소 [[스탈린]]의 인정을 받았다고 믿었다. <ref> Barnouin, Barbara; Yu, Changgeng (2006). Zhou Enlai: A Political Life. Hong Kong: Chinese University Press. ISBN 962-996-280-2</ref>
 
한국 전쟁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전쟁의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애국심으로 뭉쳐졌다. 중국인들은 그동안 전쟁이 공산주의 형제국인 북한이 아닌, 미국과 한국에 의해 일어 났다고 교육 받았다. 중국 측 [[선전 (사회학)|선전 매체]]에 따르면, 한국 전쟁은 [[중국인민지원군]]이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며 강대국 미국을 상대해 침략을 물리치고 휴전협정을 얻어낸 [[중화인민공화국]]의 업적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성과는 [[청나라]] 이후 중국이 일본과 유럽 열강에게 당한 치욕과 대비되면서, [[중국 공산당]]과 [[중국 인민해방군]]에 대한 중국인들의 충성심을 고취시키는데 사용된다.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게 있어 한국 전쟁이 가져온 가장 부정적 결과는 전쟁 이후 미국이 [[타이완|대만]] [[장개석]] 정권의 안전을 보장함으로써 [[타이완|대만]]이 [[중화인민공화국|중국]]에서 분리된 채 오늘날까지 지속되도록 했다는 점일 것이다. <ref> Barnouin, Barbara; Yu, Changgeng (2006). Zhou Enlai: A Political Life. Hong Kong: Chinese University Press. ISBN 962-996-280-2</ref>
 
한국 전쟁은 다른 참전국 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가령, [[터키]]는 [[1952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나토, NATO)에 가입한다.
 
[[File:South Africa-Korean War Memorial01.jpg|thumb|left|250px|한국전쟁을 기념하는 기념비는 전쟁에 참가한 모든 U.N. 참전국에서 볼수 있다. 사진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프레토리아]]에서 찍은 기념비이다.]]
 
미국 군대내의 인종 통합은 한국전쟁 기간동안 흑인 병사들이 처음으로 백인 병사들 사이에서 함께 싸우면서 시작되었다. 그 이전까지 독립된 부대에 소속되었던 흑인 병사들은, 전쟁 동안 신속한 병력 증원을 위해 부대 구성에 인종을 고려하지 않게 되면서 처음으로 백인들과 같은 부대에 소속되었다. 한국 전쟁에서 싸운 180만 명의 미군 병사들중, 10만명이 흑인 병사들이었다.<ref>Congressional Record, V. 146, Pt. 18, November 1, 2000 to January 2, 2001.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p. 27262.</ref>
 
전쟁 이후 [[대한민국]]내의 [[반미주의]]는 [[주한미군]] 병사의 범죄와 미국이 1980년대 군사정권을 묵인하면서 결과적으로 ''민주화 운동''을 억눌렀다는 점 때문에 점차 번져 나갔다. <ref>
[http://www.nytimes.com/1987/07/12/weekinreview/anti-americanism-grows-in-south-korea.html]The New York Times, Anti-Americanism Grows in South Korea </ref>
[[대한민국]]에서 '미국에 대한 감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1994년] [[한국 갤럽]]의 [[여론 조사]]에서는 3분의 2이상의 한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2002년]] 2월의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오직 3분의 1에 해당하는 사람들만이 긍정적으로 봤다. <ref>
[http://www.sfgate.com/cgi-bin/article.cgi?f=/c/a/2003/01/05/IN208081.DTL] San Francisco Chronicle, A new wave of anti-Americanism in South Korea, January 5, 2003 </ref>
 
또한 미국 주둔군과 한국인 여성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G.I. babies)들이 한국의 고아원을 채웠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하나의 민족' '하나의 핏줄'을 강조하는 보수적 부계질서(父系秩序)의 사회였다. 혼혈아 들과 아버지가 없는 고아는 이런 한국 사회에서 쉽게 받아들여 지지 못했다. 이들 혼혈아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이 방송을 통해 알려지면서, 수 천명의 [[한국인 입양아]]들이 전후 미국인 가정에 의해 입양되었다. <ref>
[http://www.geocities.ws/Heartland/Village/5473/articles/11.html]The Korea Times, Adult Korean Adoptees in Search of Roots, December 11, 1998
</ref>
[[1965년]]에 개정된 미국의 '이민과 국적에 관한 1965년 시행령'(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 of 1965)은 유럽 이외 여러 나라에 대한 이민 제한을 크게 없앴고, [[한국계 미국인]]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아시아계 이민 집단으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ref>[http://www.duke.edu/~myhan/kaf0501.html]Choe, Yong-Ho; Kim, Ilpyong J.; Han, Moo-Young (2005), Annotated Chronology of the Korean Immigration to the United States: 1882 to 1952, Duke.edu</ref>
 
== 기타 ==
=== 망명 정부 계획 ===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ref name="야마" />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대해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ref name="야마"/>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 미국 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ref name="야마"/>
 
한편, [[미국]]은 방어선이 무너질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인 60만 명을 이동시켜 [[서사모아 제도]] 근처의 사바이섬이나 우폴루섬에 새로이 '신한국'을 창설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고 한다.<ref> KBS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참조. </ref><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2&aid=0000042289 동남어문학회 '낙동강과 한국전쟁' 학술대회] </ref>
 
== 사용된사용되었던 무기 ==
 
*=== '''대한민국 국군 및 국제UN군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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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드넌스 ML 3인치 박격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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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국군 ===
 
* '''대한민국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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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군 ===
* ''' 국제 연합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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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민군 ===
 
* '''조선 인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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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 ===
* ''' 중국인민지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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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갑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