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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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령(領) 속주였던 유다이아 지구의 주도(州都)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의 집안에 태어났으며, 그 자신은 청년 시절에는 [[사두가이파]]나 엣세네파 같은 유대교의 여러 파를 거쳐 최종적으로 [[바리사이파]]를 선택했다고 한다. [[64년|기원후 64년]]에는 유태인들의 진정사절의 일원으로서 로마를 방문했고 [[네로 황제]]의 황후 폽파에아 사비나를 만나기도 했다.
 
[[File:Ancient Galilee.jpg|thumb|250px|The유대 [[Galilee]],전쟁 site당시 of요세푸스가 Josephus'지키고 governorship,있었던 in갈릴리 [[Late Antiquity|late antiquity]]지역.]]
그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파견되어 갈릴리의 마을인 요타파타를 지키는 지휘관으로서 로마군에 맞섰으나,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베스파시아누스 플라비우스]]ㆍ[[티투스]] 부자가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패하고 만다. 이때 이방인에 대한 투항보다 차라리 자결하는 쪽을 택한 다른 유대인 지휘관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 죽였지만, 마지막으로 요세푸스와 다른 병사 한 명이 남겨졌을 때 요세푸스는 그 병사를 설득해 함께 로마군에 투항하였다. [[67년|기원후 67년]] 7월의 일이었다. 전쟁 포로가 된 요세푸스는 앞에서 그가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목숨을 건졌다. 네로 황제 사후의 혼란을 거쳐 실제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 뒤, [[69년]] 풀려난 요세푸스는 그의 아들 티투스의 막료로서 중용되었고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70년|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포위 당시 유대 군과의 협상에 참여한 듯하다. 이후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순간을 모두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