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성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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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고성에서의 철수 준비를 하고 있던 [[9월 28일]] 밤에, 경상우병사 [[정기룡]]의 조선군이 사천고성을 포위하고 야습을 감행했다. 일본군은 성문을 열고 포위망을 돌파하려다가 많은 병력손실을 입고 사천 선진리왜성으로 철수했다. 조·명 연합군은 사천고성을 점령하고 [[10월 1일]] 선진리왜성 공격을 시작했다.
 
전쟁 도중, [[가와카미 다다노리]]는 [[세토구치 시게하루]](瀬戸口重治)에 명하여 적의 식량고를 불태웠다. 대군사력의 연합군은 식량이 부족했지만, 식료고를 구워진 것으로 한층 더 궁지에 빠져, 단기 결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 선진리왜성의 뒤에 굳세고 튼튼한 진을 쳐, 복병을 배치했다. 연합군의 공격에 대해, 요시히로는 대량의 총을 사용하거나 지뢰를 묻는 등 대항해, 연합군의 공격을 잘 방어했다. 또, 쇳조각이나 철정을 포탄 대신에 장전 한 대포도 사용했다. 연합군이 공격하다 지쳤을 때, 요시히로는 복병을 출동시켜 적의 대열을 끊어 고란해, 요시히로 본대도 공세로 변했다. 연합군은 양식에 고민하고 있었고, 요시히로군의 피로공세에 또한지쳐 있었기철수하고 때문에, 타파해져 버렸다만다.
 
전투 후, 집결해 철수할 수 있던 연합군의 병력은 1만 정도에서 끝났다고 한다.「죽인 목은 3 일만여, 방치한 시체수 알려지지 않고」라고 말해지는, 도망하거나 전투 불능이 된 사람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이 싸움에 의해 [[시마즈 요시히로]]는 「오니이시만자」(도깨비 시마즈)로 불리며 두려워하여 명성은 [[조선]]뿐만이 아니라, [[명나라]]까지 영향을 주어 건너갔다.
 
== 주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