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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장 앙리 뒤낭은 [[1825년]] 어머니 앙트와네트와 아버지 자크 뒤낭사이에서 5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네바]] 시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어머니는 [[종교개혁]]자 [[장 깔뱅]]을 존경하는 [[개신교]]신자였다. 앙리의 부모는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하는 신분이이들로 높은 자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다.아버지는 [[소년원]]에서 [[자원봉사]]를 했으며,[[교도소]] 재소자들의 [[복지]]에 관심이 있었다. [[개신교]] 전통에서 자란 앙리 뒤낭은 [[개혁교회]](Reformed)으로 전향하였는데,개혁교회 전통에서는 나눔의 실천 곧 [[기독교]] 사상의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사회운동 및 경제적 독립====
[[개신교]] 전통에서 자란 앙리 뒤낭은 나눔의 실천을 중시하는 [[개혁교회]](Reformed)으로 전향하였다. 부모의 영향으로 [[청소년]]기부터 환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구호하는 데 힘썼으며, [[1844년]]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만든 [[기독교]] 사회운동 단체인 [[기독교청년회|YMCA]](기독교 청년연합회) 창설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힘이 아닌 아버지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서 활동하는 한계를 발견하자, [[북아프리카]]의 [[알제리]]에 지역주민들의 빈곤퇴치를 위한 제분회사(製粉會社), 즉 [[밀가루]] 공장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 적십자 창립 ===
[[1858년]] [[이탈리아 통일전쟁]] 때 제분회사의 수리권(水利權)을 얻고자 북이탈리아로 [[나폴레옹 3세]]를 찾아가던 길에, [[솔페리노 전투]]에서 생긴 수천의 부상자를 만나 국적에 구애없는구애받지 구호에않는 구호활동에 참가했다. 이때의 경험은 《[[솔페리노의 회상]]》([[1862년]])에 실렸는데, 이 책에서 앙리 뒤낭은 전시의 부상자 구호를 위한 중립적 민간 [[국제기구]] 창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 제안은 유럽 각국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창설되었고, 다음해인 [[1864년]] [[정치]], [[종교]], [[이념]]의 중립성 유지, 국적에 구애없는구애받지 않는 구호활동을 원칙으로 하는 [[제네바 협약]]이 체결되었다.
 
=== 말년 ===
적십자활동을 하느라통해 부모가 물려준 유산을 포함한 전 재산을 모두 써버린 앙리 뒤낭은 [[1867년]] 고향인 [[제네바]]를 떠나 [[프랑스]] 파리에 이사하여 글을 옮겨적는 일을 하였다. [[1871년]] [[프랑스]]와 [[독일]]간의 [[보불전쟁]]이 벌어지자 앙리는 프랑스 국방위원회의 보조를 받으면서 구호활동을 하였다. [[1892년]]에는 [[스위스]]출신 [[의사]]의 배려로 알프스가 보이는 [[양로원]]에서 [[1910년]] 별세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이보냈으며, 시기에 앙리 뒤낭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음에도 마음의 평화를 누렸으며,[[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주의]] 사상을 주장하였다. [[1901년]] 박애정신과 평화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되어 제1회초대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기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