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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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Ancient Galilee.jpg|thumb|250px|유대 전쟁 당시 요세푸스가 지키고 있었던 갈릴리 지역.]]
그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파견되어 갈릴리의 마을인 요타파타를 지키는 지휘관으로서 로마군에 맞섰으나, 로마군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베스파시아누스 플라비우스]]ㆍ[[티투스]] 부자가 지휘하는 로마군에게 패하고 만다. 이때 이방인에 대한 투항보다 차라리 자결하는 쪽을 택한 다른 유대인 지휘관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 죽였지만, 마지막으로 요세푸스와 다른 병사 한 명이 남겨졌을 때 요세푸스는 그 병사를 설득해 함께 로마군에 투항하였다. [[67년|기원후 67년]] 7월의 일이었다. 전쟁 포로가 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앞에서 그가 훗날 로마의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고 목숨을 건졌다.<ref>타키투스의 《역사》에도 기술되어 있는 이 요세푸스의 예언을 베스파시아누스는 믿을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유대 전쟁사》中). 하지만 요세푸스가 네로의 다음 황제가 베스파시아누스가 될 거라고 예언했던(하지만 네로가 자살할 것이라고는 하지 않은) 기원후 67년 당시, 네로 황제는 30세의 젊은 나이였고(요세푸스와 같은 나이) 베스파시아누스는 58세(그 아들 티투스가 28세)였는데, 네로의 자살이라는 변수가 아니었다면 나이상 베스파시아누스가 먼저 죽게 될 것이고 정말 황제가 된다고 해도 네로의 나이로 보아서는 아주 먼 훗날의 일이 된다. 또한 이러한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요세푸스 자신이 네로 황제가 있는 로마로 압송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점을 들어 이 예언 자체를 요세푸스의 도박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권8, '위기와 극복' p. 221~222) </ref> 목숨을 건졌다.<ref>요세푸스의 예언을 믿어서라기보다는 단지 요세푸스의 출신 계급이나 지혜를 유대 반란 진압에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권8, '위기와 극복' p.223) 이로부터 1년 뒤에 네로 황제가 갑자기 죽고 다음 황제로 갈바가 즉위하면서, 또 갈바가 오토에게 살해되고 오토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요세푸스의 예언은 두 번이나 빗나가게 되지만 그럼에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요세푸스의 예언이 틀렸다며 책망하거나 처벌하지 않았다고 한다.</ref> 네로 황제 사후의 혼란을 거쳐 실제로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된 뒤, [[69년]] 풀려난 요세푸스는 그의 아들 티투스의 막료로서 중용되었고 그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70년|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포위 당시 유대 군과의 협상에 참여한 듯하다. 이후 그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순간을 모두 목격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다이아 지역이 진압된 뒤, 요세푸스는 [[71년|기원후 71년]]에 티투스의 수행자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하여 로마 시민권을 얻었고 죽을 때까지 평생 로마에서 살았다. 로마에서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옛 저택에 머무는 배려를 받고 점령당한 유다이아의 땅과 상당한 연금도 지급받았으며, 황제의 성씨인 '플라비우스'라는 이름까지 얻었다. [[75년|기원후 75년]]에서 [[80년|기원후 80년]] 사이에 저술된, 요세푸스의 알려진 저작들은 모두 로마에 있으면서 플라비우스 가문의 보호를 받을 때 저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