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마카가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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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zumakagami 03.jpg|thumb|right|200px|none|킷카와본(吉川本)《아즈마카가미》서문.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오우치 씨|오우치(大內) 집안]]의 중신이었던 미기타 히로아키(右田弘詮)가 집필한 것이다.]]
'''아즈마카가미'''(吾妻鏡, 오처경)는 [[일본]]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일본의 [[편년체]] 역사책이다. [[가마쿠라 막부|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의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로부터 6대 쇼군 무네타카(宗尊) 친왕까지 여섯 명의 쇼군의 사적(事蹟)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했으며, 시대상으로는 지쇼 4년([[1180년]])부터 분에이 3년([[1266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동감'''(東鑑)이라고도 쓴다. 성립 시기는 가마쿠라 중기인 13세기 중엽 이후 가마쿠라 말기인 14세기 초엽 이전에 바쿠후의 요직을 맡고 있던 여러 관리가 편찬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쿠후의 권력자였던 호죠(北條) 종가측의 입장에서 기술되어 있으며 편찬 당시에 남아있던 기록이나 전승을 추린추려낸 것이지만 내용은 대체로 정확하며, 가마쿠라 바쿠후의 정치와 물심양면에 걸친 무사의 생활을 연구하는 데 전제가 되는 기본사료이다. 모두 52권이 현존하는데 제45권은 빠져있다누락된 상태다.
 
== 개요 ==
 
[[정유재란|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아즈마카가미》를 직접 읽어볼 기회가 있었던 [[조선]]의 선비 [[강항|강항(姜沆)]]은, 《아즈마카가미》라는 이름이 "나의 잘잘못이 곧 나의 아내에게 나타나므로 나의 아내를 보면 나의 잘잘못을 알 수 있다"는 데에서 그렇게 이름지은명명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ref>《간양록》적중봉소(賊中封疏),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中에서.</ref> 내용은 지쇼 4년(1180년) 4월, 도고쿠의 겐지들에게 헤이케 타도의 거병을 호소하는 모치히토왕(以仁王)의 영지(令旨)가 당시 이즈의 호죠 저택에 유배되어 있던 요리토모에게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으며, 분에이 3년(1266년) 7월 20일에 가마쿠라에서 쫓겨난 6대 쇼군 무네타카 친왕이 교토에 도착해 쇼군에서 물러나는 데에서 끝맺고 있다. 그 사이에 지쇼ㆍ슈에이의 난과 헤이케 정권의 멸망, 요리토모의 쇼군 임명과 죽음, 죠큐의 난을 거쳐 호조 야스토키의 싯켄 정치의 시작, 나아가 13세기 중반인 간겐 4년([[1246년]])의 궁에서 일어난 소동과 이듬해의 [[호지 (연호)|호지(寶治)]]의 난을 극복한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에 의한 호조 종가의 바쿠후 단독 지배의 달성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무가 정권이나 사회의 움직임을 쇼군의 연대기로서 일기 형식을 취해, 흔히 '아즈마카가미체'라고도 불리는 화풍한문(和風漢文)<ref>변체 한문의 일종으로 한문체가 현저하게 무너진 당시의 일용문체</ref>으로 기술되고 있다. 수록 범위야 무네타카 친왕의 쇼군직 퇴위까지 다루고 있지만, 편찬 자체는 미완성으로 끝났을 거라는 설이 유력하다.
 
본서 편찬에 참조하기 위해 수집된 문헌은 본서가 편찬된 시기인 가마쿠라 시대 후기(서기 1300년경)에 남아있던 광범위한 문서류였다.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오에(大江)ㆍ미요시(三善)ㆍ니카이도(二階堂) 집안 등 바쿠후를 섬겨온 문필 가문(막부의 기술관료)에 남아있던 바쿠후의 기록, 역대 문필 관료의 필록 및 일기를 중심으로, 호죠 집안의 여러 방계, 인연이 있는 고케닌(御家人)의 집안 전승, 소송의 증거로 바쿠후에 제출된(가짜 문서도 포함된) 서류, 나아가 지샤의 기록에 가능한 경우 《메이게츠키(明月記)》 등의 문신의 기록들도 참조했다. 때문에 상당한 범위에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인식이 섞여 있다고 보는 것이 무난하고, 또 일부의 경우 분명히 편찬 당시에 곡필 내지 가필된 부분도 있다. 특히 전반의 겐지 3대 쇼군의 기사는 《[[구칸쇼|구칸쇼(愚管抄)]]》나 《교쿠요(玉葉)》 등 동시대 문신들의 일기와 비교해가며 신중하게 이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