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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조 천황과 마찬가지로 시라카와 천황도, 그 생모가 셋칸케가 아닌 한인류(閑院流) 소생으로서 츄나곤 후지와라노 기미나리(藤原公成)의 딸이자 춘궁대부 후지와라노 요시노부(藤原能信)의 양녀인 뇨고(女御) 시게코(茂子)였는데, 간파쿠를 그대로 둔 채로 고산조 천황처럼 친정을 행했다. 천황은 [[오토쿠|오토쿠(應德)]] 3년([[1086년]])에 당시 여덟 살에 불과했던 요시히토(善仁) 친왕([[호리카와 천황]])에게 양위하고 타이죠덴노(太上天皇)이 되었는데, 어린 주상의 후견으로서 시라카와인(白河院)이라 칭하며 양위하기 전처럼 계속 정무를 살폈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인세이의 시작으로 본다. [[가조|가조(嘉承)]] 2년([[1107년]])에 호리카와 천황이 죽고 네 살에 불과한 황태자가 즉위하면서([[도바 천황]]), 다소나마 정책 수립 및 결정에 천황의 독자성이 있었던 호리카와 천황 때보다 더 확실하게 인세이는 강화되었다. 시라카와인 이후 인세이를 행했던 상황들은 모두 '치천의 군', 즉 사실상의 군주로서 군림했고 이 시기 천황은 동궁(황태자)에 불과한 신세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시라카와 천황이 당초부터 그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인세이의 체제를 의도한 것은 아니다. 흐름이 '결과적으로' 그렇게 흘러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라카와 천황의 본뜻은 황위 계승의 안정화(라기보다도 자신의 계통에게 황위를 독점시키는 것)에 있었다. 동생 사네히토 친왕ㆍ스케히토 친왕이 유력한 황위계승 후보로 존재하고 있는 와중에, 자신의 자식인 요시히토 친왕에게
한편 히구치 켄타로는 시라카와 법황의 인세이의 전제로서 황태후 조토몬인(上東門院) 아키코(彰子, 후지와라노 아키코)의 존재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자신의 소생인 [[고이치조 천황|고이치조(後一條) 천황]]을 황태후의 입장에서 지지한 이래 그녀는 시라카와 덴노의 대까지 5대에 걸쳐 천황가의 웃어른과 같은 존재로 군림했다. 천황의 대리인 셋쇼도 자신의 임면을 천황의 칙허로 행하지 못했고(그러면 결과적으로 셋쇼 자신이 직접 자신의 진퇴를 판단하는 모순 상태에 빠지므로), 셋칸케의 전성기를 쌓아올렸다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ㆍ요리미치 부자의 셋쇼 임면조차도 그녀의 영지를 받고서야 이루어졌다. 후지와라노 모로자네는 자신의 권위를 부여하고자 자신의 셋칸의 임면에 미치나가의 선례를 모방해 시라카와 상황이 관여해줄 것을 요구했고, 천황 재위 중의 협조 관계뿐 아니라 상황의 행차에 구교를 동원한다거나 인노고쇼(院御所)를 짓는 데에 여러 쿠니에 세금을 매기는 등 그 권한 강화에 적극 협력했다. 시라카와 상황도 인쵸(院廳)의 인사권은 모로미치에게 일임하는 등 그를 국정의 주도자로서 인정해주는 정책을 채택해 왔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모로미치ㆍ모로자네가 급서하는 바람에 모로자네가 자신의 권위를 지키고자 고의로 떠받들었던 시라카와 상황(법황)의 권위며 조토몬인의 선례를 근거로 한 시라카와 상황(법황)의 셋칸 임명에 관한 인사권 관여 등, 그의 모든 노력이 결과적으로 후지와라노 다다자네의 셋쇼 임명을 시작으로 하는 '치천의 군'에 따른 셋칸 임명을 정당화시켜버렸다. 셋칸을 상황이 지목하게 된 것이다. 부계 직계에 의한 황위계승은 그 황위를 이어받을 '남자'를 반드시 확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황통이 자칫 단절될 위험이 있고, 거꾸로 많은 황자가 있어도 그들에 의한 황위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인세이에서는 '치천의 군'이 차기 혹은 그 차기 천황을 지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안정된 황위계승을 실현할 수 있었고, 황위 계승에 '치천의 군'의 뜻을 반영시킬 수도 있었다. 또한 외척 관계를 매개로 한 셋쇼 칸파쿠와는 달리 인세이는 천황의 친아버지라는 직접적인 부계 혈연에 근거한 것이었기에 전제적인 통치가 가능했다.
인세이를 행하는 상황은 자기의 정무 기관으로서 인쵸를 두고 인센(院宣)ㆍ인쵸하문(院廳下文) 등의 명령문서를 발급했는데, 기존의 학설에서는 인쵸에서 조정의 모든 실제 정무가 이관되다시피 하여 이루어졌다고 여겨졌지만 근래에는 '비공식 사문서'로서의 측면이 있는 상황의 인센을 통해 인쵸에서 조정에 압력을 가하고, '인의 근신(近臣)'이라고 불리던 상황의 측근을 태정관에
=== 인세이의 최전성기와 쇠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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