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랑호 납북 사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 개요 ==
1958년 2월 16일 부산발 서울행 대한국민항공사 소속 창랑호(당시 기종 : [[더글러스 DC-3]], 등록부호:HL106) 여객기는 기장 윌리스 P. 홉스와 부기장 멕클레렌 미 [[공군]] 중령이 조종을 하였으며, 승객 30명과 승무원 3명 및 미군 군사고문단원 중령 1명 등 34명을 태우고 오전 11시 30분 이륙한 후, 평택 상공에서 납치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직할시]]에 있는 [[평양 순안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 당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언론기관을 통하여 "대한국민항공사가 '의거월북' (자신의 의지로 군사분계선을 넘음) 했다"고 거짓 발표하였다.
한편, 대한민국 [[경찰]]은 같은달 20일 북한공작원인 김택선을 포함한 3명이 범인으로 발표하고 25일에는 기덕영등 3명을 사건의 공작과 배후공작의 혐의로 체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월 22일 [[국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행하고, UN군에 참가한 16개국에 대해 협력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이를 받은 UN군은 [[2월 24일]]의 군사정전위원회에 수석대표가 승객과 승무원, 기체의 조속한 송환을 북조선에 요구하여, [[1958년]] [[3월 6일]] 스튜어디스, 유아 1명, 납치범으로 생각되는 7명을 제외한 모든 승객과 승무원을 [[대한민국]]에 돌려보낸다. 이 과정에서 납치범들은 승객으로 있던 사람 중에서 군사고문단원인 [[미군]] [[중령]] 1명을 사살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창랑호에 탑승한 모든 인원에 대해 세뇌를 실시했으며 이에 협조적이지 않은 일부 탑승자들에게 고문을 하였다.
 
한편 창랑호의 기체는 반환하지 않아 대한국민항공사는 운행상의 커다란 타격을 받아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골치를 썩이게 된다. 당시 대한국민항공사는 만송호, '''창랑호''', 우남호. 이렇게 3대의 항공기로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창랑호가 납북당하기 전에 이미 [[1957년]] [[7월 7일]]에 만송호가 [[부산]] 수영비행장에 착륙하던 도중 기체가 크게 파손되어 전손처리된 상황에서 창랑호마저 납북으로 잃게 되어 우남호 하나만으로 항공사를 운영해야만 했기 때문에 적자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국민항공사는 결국 [[1959년]] [[4월 22일]]에 큰 돈을 들여 DC-3기 1대를 추가 도입하여 그날로 국내선에 투입하였고 [[1959년]] [[7월 28일]]에는 미국 록히드사에서 콘스틀레이션 749A 4발 여객기 1대를 임차하여 국내선과 국제선에 병용 취항하여 도입 20여일만에 50명의 유학생을 태우고 태평양을 횡단, 서울 ― 시애틀간을 부정기 운항하기도 하였다.
한편 창랑호의 기체는 반환하지 않아 대한국민항공사는 운행상의 커다란 타격을 받아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골치를 썩이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국민항공사는 만송호의 전손처리와 창랑호의 납북으로 인해 발생한 적자를 끝내 해소하지 못하는 바람에 [[1961년]] [[7월 16일]]에 대한국민항공사의 창업주이자 사장인 신용욱 대표가 한강에 투신자살을 하였으며 결국 대한국민항공사는 [[1961년]] [[11월 13일]] 폐업처리 되었다.
그 후 기덕영 등 3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이 가운데 기덕영은 스파이죄 이외의 죄상으로 징역 7년형이 선고되었고 다른 2명은 무죄로서 석방된다.
 
창랑호 납북사건이 종결된 후 기덕영 등 3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이 가운데 기덕영은 스파이죄 이외의 죄상으로 징역 7년형이 선고되었고 다른 2명은 무죄로서 석방된다.
 
== 출처 및 바깥 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