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커스터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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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3세]]의 살아남은 아들 중 세 번째인 [[제1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초대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이 시조이다. 3남인 존은 많은 영지와 권력을 세습받지 못했지만, 먼 친척이자 에드먼드의 증손녀 블랑쉬와 결혼해 그녀가 상속받은 레스터 백작령과 랭커스터의 넓은 영지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다. 장인인 [[그로스먼트의 헨리]]가 죽은 다음 해인 [[1362년]], 아버지 에드워드 3세는 [[랭커스터 공작]] 작위를 다시 만들어 그를 임명하였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영지를 바탕으로 한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누렸으나 [[1399년]] 그가 죽은 이후 [[리처드 2세]]가 영지를 몰수하고는 상속자였던 [[헨리 4세|헨리 볼링브로크]]를 추방해버렸다.
 
같은 해, 아직 안정되지 않은 정국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 방문을 하는 동안 반란의 기회를 엿보던 의회파가 봉기를 일으켰고, 그들은 랭커스터 영지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려고 귀국한 헨리를 지도자로 옹립했다. 소식을 들은 리처드는 황급히 잉글랜드로 되돌아 왔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못한 패하면서 구금되었고패전해버렸고, 리처드는 상태로유폐된 상태에서 죽어버렸다. 이에 헨리는 스스로를 헨리 4세로 칭하며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왕위 계승권은 [[에드워드 3세]]의 살아남은 아들 중 두 번째인 [[제1대 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클래런스 공작 라이오넬 앤트워프]]의 후손이 우선 순위에 있었음에도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 4세가 이 순위를 건너 뛰고 승계함으로써 분란의 불씨가소지가 생기게남아 되었고있었고, 라이오넬이후 라이오넬의 후손이 플랜태저넷 왕가의 다른 방계인 [[요크 왕가|요크 가문]]과 결혼을 통해 결합함으로써 정통성이 더욱 강화되면서강화되자 분쟁의 소지는 더 커지면서커지게 되었다. 결국 이 왕위 계승권과 정통성 문제는 [[헨리 6세]] 부터 시작된 [[장미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헨리 4세의 왕위는 아들 [[헨리 5세]], 그리고 손자인 헨리 6세까지 이어졌으나, 헨리 6세가 랭커스터 왕가의 마지막 [[영국의 군주|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