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고가도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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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1950년대 중반, [[청계천]]은 [[전쟁]]을 경험하고, 슬럼지역이 되고 있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하여진 것이, 청계천 복개사업이었다.
 
 
청계천 복개사업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되고 있었지만, 독립후의 [[1955년]]에 시작하고, [[1958년]]부터 본격적으로 복개되기 시작했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에 광교로부터 청계6가([[동대문 야구장]] 부근)까지, [[1965년]]부터 [[1967년]]에 걸쳐서는 청계6가에서 청계8가(신설동)까지, [[1970년]]부터 [[1977년]]에 걸쳐서는 청계 8가에서 신답철교까지 복개되었다. 그리고 복개된 청계천 위에 청계천고가도로가 건설되게 된다.
 
 
청계천 주변에 난립하고 있었던 판잣집은 걷어 치워져서, 맨션이나 상점가가 건설되었다. 한편 청계천 복개로 청계천 주변에 살던 많은 사람들은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으로 강제로 이주하게 되었다.
 
 
중구 광교에서 동대문구 용두동에 이르는 길이 5 ~ 6km, 폭 16m의 청계고가도로는 1967년 [[8월 15일]]에 착공하고, [[1971년]] 8월 15일 완공했다. 이 고가도로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 고가도로였다. 청계고가도로 아래의 도로는 청계천로라고 불려, 교통을 분산되게 하는데도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주위에는 양복이나 전기부품의 도매상가가 많아, 상하차 작업을 하는 주차 차량이 청계천로에 넘치고, 심각한 교통 정체를 일으키는 것이 된다.
 
그후 청계고가도로는 2000년대에 들어서 낡게 되며 노후화 문제로 시달리게 되며, [[2002년]] 7월부터 대형차의 진입이 금지되고, [[2002년]]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선거공약으로 청계천 공사를 기약하게 된다. 결국 [[2003년]]부터 [[2005년]]까지 청계천의 공사 기간이 정해졌고, [[2003년]] [[6월 30일]] 오후 12시를 기해 모든 차량, 모든 사람이 다닐 수 없도록 전면 폐쇄하여 곧 철거 공사를 시작했다.
 
그후 청계고가도로는 2000년대에 들어서 도로가 낡아져 노후화 문제로 시달리게 되며, 결국 [[2002년]] 7월부터 대형차의 진입이 금지되고, 같은 해 그 당시이명박 서울시장의 취임으로 인하여 청계천 복구공사의 기반이 만들어졌다.
청계천 공사는 5.8Km의 청계 고가도로를 철거, 하천 복원을 위한 대규모 공사로, 약 3,600여억원의 복구액, 약 2,021헥타르 복구를 함으로써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10월 1일]]까지 약 2년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청계천을 복구하였다.
 
 
청계천 복구공사는 약 3,500여개의 그루가 복원이 되는것과 같으므로 찬성하는 사람이 몇명 있었지만, 대다수는 청계천 복구공사를 반대하기 일쑤였다. 그 옆에는 많은 상점가가 자리잡고 있었고, 교통지의 중심이 되는 곳이였으므로 상점인이나 청계고가도로를 지나는 직장인에게 많은 반대를 받았다.
 
 
하지만 그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이명박 서울시장은 [[2003년]] [[6월 30일]] 오후 12시부터 기해 모든 차량을 출입 금지시켜 청계고가도로를 완전 폐쇄 시켰고, 그 후로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며 [[2003년]] [[7월 1일]]부터 [[2005년]] [[10월 1일]]까지 2년 3개월이라는 긴 시간동안 약 3,600억원의 복구액을 들여 청계천을 복구시켰다.
 
 
청계천 복구공사는 성공한 공사로써 환경을 복구하는데 큰 틀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후 청계천은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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