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비우스 요세푸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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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
 
역사학자 E.메리 스몰우드(E. Mary Smallwood)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세푸스의 생애는 모호한 점이 많다. 플라비우스 왕조 3대의 황제를 섬기며 어떤 제약도 없는 생애를 보낸 것처럼 보이지만,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그가 전쟁 당시 갈릴리에서 동료들과 같이 자살하지 않고 로마 군에 투항한 점, 포로가 된 후에는 로마 군과 협조한 점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그러한 요세푸스 본인에 대한 동포 유대인이나 로마인들로부터의 비난, 그리고 중상모략은 그가 특별한 정치활동보다는 저술에만 몰두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요세푸스를 배반자 및 밀고자로 보는 입장에서 그의 저술은 로마의 선전물 내지는 자기 변명 정도로 여겨졌고 역사가로서의 그의 신뢰도는 평가절하되어 왔다. 오늘날까지 정통 유대교도들에 의해 요세푸스는 '배신자'로 평가되고 있다.
{{인용문|(요세푸스는) 그 자신이 가진 학식뿐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던 갈릴리인과 로마인 양쪽 모두의 지휘관으로서의 견해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그는 요타파타에서의, 그의 동지들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 자기 자신을 살렸던 충격적인 이중성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 자신이 얼마나 신랄하게 그의 '앞잡이'로서의 행동을 그 자신의 입으로 털어놓았는지에 대해 깨닫기에는 너무 순진했으며, 그가 그의 반대자들에 의해 더럽혀진 것에 대한 지나친 혹독함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로마군에 가담한 뒤, 그는 그 자신의 포로라고 하는 강점에 의지했고 그것은 다른 한편에서의 그의 여생에 효과적이었다.}}
 
요세푸스의 생애는 모호한 점이 많다. 플라비우스 왕조 3대의 황제를 섬기며 어떤 제약도 없는 생애를 보낸 것처럼 보이지만, 그를 비난하는 이들은 그가 전쟁 당시 갈릴리에서 동료들과 같이 자살하지 않고 로마 군에로마군에 투항한 점, 포로가 된 후에는 로마 군과 협조한 점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해왔다. 실제로 그러한 요세푸스 본인에 대한 동포 유대인이나 로마인들로부터의 비난, 그리고 중상모략은 그가 특별한 정치활동보다는 저술에만 몰두하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요세푸스를 배반자 및 밀고자로 보는 입장에서 그의 저술은 로마의 선전물 내지는 자기 변명 정도로 여겨졌고 역사가로서의 그의 신뢰도는 평가절하되어 왔다. 오늘날까지 정통 유대교도들에 의해 요세푸스는 '배신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로마 시대, 특히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대에 유대인들과 유대 문화에 대한 중요한 변명자였음은 틀림없다. 그는 스스로 애국적이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으로 보았다. 교육받은 이방인들에게 유대교를 옹호하고 추천하기까지 했으며 그리스-로마 사상과의 호환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대 문화가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유대인들을 문명화되고 신앙심이 두터우며 철학적인 민족으로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