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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1904년]] 관립한성고등보통학교, [[1908년]] [[보성전문학교]] 법률과를 졸업했다졸업하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1909년]] 문학과대한제국 교외생으로학부위원으로 재학임명되었으며 중이던일본 [[1909년와세다 대학]] 대한제국문학과에 학부위원으로교외생으로 임명되었다입학하였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과 속(屬)으로 근무하였고 [[1912년]]부터 [[1915년]]까지 보성전문학교 법률과 강사를 겸임했다. 1917년 [[경기도]] 김포군수로 임명되었으며 [[3·1 운동]] 당시 만세 시위 같은 추악한 투쟁과 쓸데없는 희생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뒤부터 이를 막기 위해 나머지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920년]] 6월 병으로 군수직을 사임하였다. [[1921년]] 병에서 회복하여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강연을 하고 글을 발표하면서 [[황민화정책황민화 정책|황민화 운동]]에 앞장섰다. [[1937년]] [[조선총독부]]의 학무국 촉탁으로 있을 때, [[황국신민의 서사황국신민서사]]의 문안을 만들었다.<ref>{{서적 인용
|저자=반민족문제연구소
|제목=친일파 99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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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이 기획에 따라 학무국 촉탁으로 있던 아오야마(靑山覺鐘), 즉 이각종이 문안을 만들었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 과장이던 김대우가 관련 업무를 집행하였다.
|꺾쇠표 = 예
}}</ref> [[태평양 전쟁]] 종전 후인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서울]]에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충격으로 정신이상 상태가 된 것으로 판정이 나면서 풀려났다.
}}</ref>
 
[[태평양 전쟁]] 종전 후인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서울]]에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일본 제국]] 패망 이후 충격으로 정신이상 상태가 된 것으로 판정이 나면서 풀려났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ref>{{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