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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사립 원산원흥일어학교(元山源興日語學校)를 졸업했고 모교에서 교원이 되었다가 퇴직했다. [[1908년]] [[3월 19일]]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영흥분서 통역으로 근무했고 [[1909년]] [[4월 17일]]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도번역관보(道飜譯官補)로 임명되었다. [[1910년]] [[7월 1일]] 경상남도 창녕경찰서에서 통감부 경찰서 통역생으로 근무했고 [[1910년]] [[10월 1일]]부터 [[1912년]] [[6월 12일]]까지 경상남도 창녕경찰서 통역생으로 근무했다.
 
[[1912년]] [[6월 13일]] 경상남도 진주경찰서 경부, 1912년 12월 19일 평안남도 평양경찰서 경부, [[1914년]] [[4월 18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경부, [[1916년]] [[4월 7일]] 함경남도 원산경찰서 경부, [[1918년]] [[9월 17일]] 함경남도 영흥경찰서 경부, [[1919년]] 7월 경성부 종로경찰서 도경부로 근무했으며각각 임명되었으며 1912년 8월 1일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다이쇼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20년]] [[8월 12일]] 평안남도 도경시로 임명되었고 [[1921년]] 5월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근무했다. [[1925년]] [[1월 15일]] 경기도 도경시로 임명되었고 1925년 2월 5일부터 1929년까지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 1925년 7월 4일부터 1929년까지 경기도 도경시 겸 순사교습소 교관으로 근무했다. [[1928년]] [[1월 20일]]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 1928년 11월 16일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으며 [[1930년]] [[2월 28일]] 경기도 진위군수로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25일]] 경기도 경성부 부이사관(府理事官)과 서무과장을 역임했고 1932년 6월 6일 경성부 부이사관과 사회과장으로 근무했다. [[1933년]] [[1월 19일]]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으며 [[1934년]] [[4월 29일]] [[만주 사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하사금을 받았다. [[1935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평안북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고 193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과 은배 1조를 받았다.
 
[[1937년]] [[2월 20일]]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을 역임했으며 전라남도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1937년 2월 20일 ~ 1938년 6월 22일), 전라남도 도농회장(1937년 3월 6일 ~ 1938년 6월 26일),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1937년 4월 15일 ~ 1938년), 전라남도방공위원회 위원(1938년 3월 30일 ~ 1938년 7월 20일)을 역임했고 [[1938년]] [[6월 23일]]부터 [[1939년]] [[3월 14일]]까지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참여관과 내무부장을 역임했다. [[1938년]] [[1월 3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사를 통해 일본 천황의 만수무강과 국운의 융성을 기원하고 총후의 책무 완수를 강조했으며 1942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사를 통해 순국정신을 발휘하고 총후전사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1939년]] [[2월 14일]]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았고 [[1939년]] [[3월 15일]]부터 [[1940년]] [[9월 1일]]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을 역임했다.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1939년 4월 17일 임명),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간사(1939년 4월 20일 임명), 조선총독부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자원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농촌진흥위원회 위원 겸 간사, 조선총독부 저축장려위원회 간사,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박물관건설위원회 간사(1939년 4월 24일 임명), 조선미술심사위원회 간사(1939년 4월 28일 임명),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관리양성소 강사(1939년 5월 5일 임명),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제1부원 및 제2부원) 겸 간사(1939년 5월 8일 임명), 조선총독부 학무국 교학연수소 강사(1939년 6월 13일 임명), 조선총독부 중견청년수련소 강사(1939년 8월 1일 임명) 등을 역임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제국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으며 [[1942년]] [[2월 20일]] 남작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계급인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40년]] [[9월 2일]]부터 [[1942년]] [[1월 23일]]까지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했으며 1940년 10월 16일부터 1942년 1월 23일까지 국민총력전라북도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1941년]] 3월 잡지 《[[조광]]》에 실린 글에서 조선 동포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구현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는 한편 국민총력운동 강화를 통한 고도국방국가체제 확립을 위해 매진할 것을 주장했다.
 
[[1943년]] [[2월 16일]]부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으며 1944년 6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5년 2월 11일 [[대화동맹]] 심의원, 1945년 6월 24일 [[대의당]] 위원을 역임했다. 1943년 11월 [[충청남도]]에서 임시특별지원병제의 취지를 선전했으며 [[1944년]] 5월 하순부터 6월 중순까지 조선인 학병이 입대해 있던 일본 현지 부대를 격려 방문한 뒤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학병, 징병, 징용을 선전, 선동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1월 2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고 1949년 4월 18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지만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