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영 (1874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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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대한제국]] 시대였던 [[1904년]] [[9월 15일]]부터 [[1905년]] [[11월 7일]]까지 용천감리서 주사(龍川監理署 主事, 판임 6등)를 지냈으며 [[1907년]] 친일 성향의 유림 단체인 [[대동학회]](大同學會) 서기를 지냈다. [[1911년]] [[9월 8일]]부터 [[1921년]] [[7월 30일]]까지 [[경학원]] 직원(直員), [[1921년]] [[7월 31일]]부터 [[1936년]] [[1월 17일]]까지 경학원 사성(司成)을 역임했고 [[1936년]] [[1월 18일]]부터 [[1943년]] [[4월 26일]]까지 경학원 부제학(副提學)과 [[명륜학원]](明倫學院) 강사를 겸임했다.
 
[[1911년]] [[9월 8일]]부터 [[1921년]] [[7월 30일]]까지 [[경학원]] 직원(直員), [[1921년]] [[7월 31일]]부터 [[1936년]] [[1월 17일]]까지 경학원 사성(司成)을 역임했으며 [[1936년]] [[1월 18일]]부터 [[1943년]] [[4월 26일]]까지 경학원 부제학(副提學)과 [[명륜학원]](明倫學院) 강사를 겸임했다.
 
[[1928년]]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으며 [[1939년]] [[11월 1일]]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발기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종교 부문과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