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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책인 《[[신당서|신당서(新唐書)]]》신라전(新羅傳)에는 "재상가(宰相家)에는 녹이 끊이지 않는데, 노동(奴童)이 3천 인이고 갑병(甲兵)과 우마(牛馬)와 돼지도 그만큼 된다."<ref>《신당서》신라전, "宰相家不絕祿, 奴僮三千人, 甲兵牛馬豬稱之."</ref>는 기록이 있는데, 일제 시대에 사회경제사학자 [[백남운|백남운(白南雲)]]이 그의 저서 「조선사회경제사(朝鮮社會經濟史)」(1933)에서 이 기록을 처음으로 찾아내어 언급하였고, [[사회주의]] 사학자 이청원(李淸源)의 「조선역사독본(朝鮮歷史讀本)」(1937년)과 일본 학자 후지타 요사쿠(藤田亮策)의 「신라구주오경고(新羅九州五京攷)」(1953) 등에서 신라에 사병이 있었음을 인정하였다. 여기에서는 신라 중앙귀족의 사병에 대하여, 《삼국사기》김양전(金陽傳)에 실려있는, 흥덕왕 사후에 왕위를 놓고 김균정과 [[희강왕|김제륭(金悌隆)]]이 벌인, 그리고 김균정의 아들 [[신무왕|김우징(金祐徵)]]과 [[민애왕]]의 전투에 대한 기록이다. 이때 김균정의 편에 서있던 김양이 '''족병(族兵)'''을 거느리고 먼저 궁으로 들어가서 지키고 있었고<ref>《삼국사기》44, 김양전</ref>, 균정이 패하여 죽은 뒤 숨어 지내다가 그의 아들 김우징이 [[청해진|청해진(淸海鎭)]]에서 [[장보고|장보고(張保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김양 자신이 '''모사(慕士)와 병졸을 모아''' 청해진에 가서 김우징을 뵈었다<ref>위와 같음.</ref>는 기록을 찾아냈고, 여기서 말한 '족병'이나 김양 자신이 불러모았다는 '모사와 병졸'이 바로 김양 자신의 사병이었음을 주장하였다.<ref>또한 처음 김우징과 김제륭의 전투에서 김양의 넓적다리를 화살로 쏘아 맞춘 배훤백(裵萱伯)은 《삼국사기》김양전에 김제륭의 하(下, 하사下士)로 기재되어 있는 점을 들어 배훤백은 김제륭의 족병이었다고 보았다. 이기백, 위의 논문(1955, 위의 책, p.258)</ref>
 
중앙 조정의 귀족뿐 아니라 지방의 세력가들도 그들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삼국유사》혜공왕조에 "왕도 및 5도 주군의 96각간이 서로 싸워서 크게 어지러웠다"는 기록은 왕도 즉 서라벌뿐 아니라 지방(5도주군)의 '각간'이라 불린 세력가들이 그들끼리 서로 항쟁할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해석되었다.<ref>이기백, 위의 논문(1955, 위의 책, p.263)</ref> 9세기 말, 진성여왕 이후 신라 조정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초적이 각지에서 발호하던 시점에서 지방의 군태수나 현령 등은 '장군' 또는 '성주'라 칭하면서 독립된 사병을 지닌 자들로서 그 세력을 떨치게 되었으며, 『봉림사진경대사비』에 나오는 진례성주처럼 신라 조정으로부터 '지진례성제군사(知進禮城諸軍事)'와 같은 '지제군사'의 칭호를 받거나 혹은 궁예ㆍ진훤 등 강력한 반신라 봉기세력에 가담하기도 하면서 그들이 다스리는 범위 내에서나마 중앙과 맞먹는 독립된 권력을 누리며 따로 행정조직을 갖추기도 했음을 《고려사》선거지나 『용두사철당기(龍頭寺鐵幢記)』에서 볼 수 있다. 이기백은 「신라사병고」에서 조선 후기의 《[[연조귀감]]》에 기재된 《흥양이씨보(興陽李氏譜)》의 기록 "신라 말에 귀족의 후예가 다투어 호무(豪武)를 사용하여 주와 현을 제패하였는데, 고려 통합 초에 귀복하지 않는 자가 있자 이들을 진압하지 못할까 근심하여 강제로 소재지의 호장으로 삼았다"는 기록을 찾아내어, 고려 초에 호장으로 개편된 신라 말의 지방 호족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지방에서 패권을 쥐었던 사실을 언급하였다.<ref>《연조귀감》이나 《흥양이씨보》보다 앞선 기록인 김종직의 《이존록》에는 "(지방에 흩어진 김씨 종파와 지파의 후손들이) 서로 다투어 호무(豪武)를 사용하여 주군(州郡)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 토지와 인민(人民)을 차지하고서 나라에 공부(貢賦)를 바치고..."라는 기록이 있다.</ref>
 
== 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