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렐치나의 비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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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Don Bosco - S. Stanislao 07.JPG|thumb|[[로마]]에 있는 성 비오 신부 성상.]]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산조반니로톤도의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원에서 네 명의 수사에게 징집령이 내려졌다. 당시 비오 신부는 가톨릭 신학교의 교수이자 영적 지도자로 있었다. 수사 한 명이 추가로 징집되자 자연스럽게 비오 신부가 수도원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1917년 8우러 비오 신부마저 징집령이 떨어져 소환되었다. 비록 건강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군 의무대대 100중대 4소대로 배치되었다. 10월 중순에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였지만, 1918년 3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병역 면제를 받았다. 군대에서 퇴소한 비오 신부는 수도원으로 돌아왔으며, 피에트렐치나에 있는 천사들의 모후 성당에서 사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중에 비오 신부가 기적을 일으킴으로 해서 명성이 날로 높아져가자 수도회 장상은 그를 산조반니로톤도에 있는 수도원으로 다시 보냈다.비오 신부의 군복무는 총 182일간이었다.
 
그 후 비오 신부는 영성 지도자로서 많은 신자를 자신의 영적 자녀로 생각하고 그들의 영성을 지도하였다. 그는 영적 성장을 위하여 일주일마다 [[고해성사]]와 미사 봉헌, 성경 읽기, 명상 그리고 양심 성찰을 실천하였다.[9]
 
그는 고해성사를 방 청소에 비유하며, 신자들에게 한주마다 고해성사를 한 번 이상 볼 것을 권유했다. 그리고 하루에 아침과 저녁마다 명상과 양심 성찰도 실천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리고 “기도하고, 희망을 가지고,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또한 모든 사물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게 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게 하도록 신자들을 교육하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