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 대첩: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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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은 고구려가 전략 요충지인 [[요서]] 지방을 선제 공격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수 양제]]는 고구려가 돌궐과 내통하여 수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알고 [[612년]] [[1월]] 113만 3800명( 보급병 등의 기타 병력을 포함하면 총 200만명에서 400만명 정도이다. )의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수나라 군사는 하루 1군(軍)씩 보내 40일 걸려 겨우 출발이 끝났으며, 깃발은 960여 리에 뻗쳤다 한다. 육군은 [[요동성]](遼東城)으로, 수군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직할시|평양]](平壤)성으로 향하였다.
 
그해 4월에는 요하를 건너 별대(別隊)는 양제의 지휘하에 고구려의 요새인 요동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성군은 힘써 싸웠으므로 수군은 조급해져서 다시 별동대 30만 5천 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켜, 단숨에 평양성을 공격하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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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과 ==
수나라군이 [[청천강|살수]]에 다다랐을 때에는 물이 얕았다. 을지문덕이 둑을 쌓아 물의 흐름을 막았기 때문이다. 수나라군은 이를 알지 못하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는데, 반쯤 건넜을 때 고구려군이 둑을 무너뜨려 수공을 하였다. 수나라군은 물에 휩쓸리고 뒤이어 공격해 온 고구려 기병에 당해 수나라 장수 [[신세웅]](辛世雄) 등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남은 자들도 살아남기 위해 [[랴오둥 반도|요동 반도]]까지 도망가야 했다. 30만 5천 중 생존자는 2700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특히 신세웅 장군이 이끄는 제 8군은 지휘관인 신세웅 장군을 비롯하여 단 한명조차 생존자가 없이 모두 전멸되었다.
 
또한 살아남은 장병들은 우문술과 우중문을 비롯하여 설세웅을 제외한 모든 장병들의 작위가 박탈되었다. 단, 설세웅만은 갑옷을 고구려군에게 벗어 던지고 종횡무진 활약한 점을 감안하여 작위만은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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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보기 ==
{{위키자료집|조선상고사/제10편}}
* [[임유관 대첩|임유관 전쟁]] (제1차 고수전쟁)
* [[고구려-수 전쟁]]
* [[을지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