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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1년]] 훌라구에게 살해된 압바스 왕조 최후의 [[칼리파]] [[알무스타심]]의 숙부를 카이로에서 보호했다. 이 돌연한 행동은 카이로 주민에게 갑작스런 지배자가 되었던 바이바르스에게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 구심력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쿠투즈를 살해하고 즉위한것 때문에 상당히 평판이 좋지 못하였다). 다만 바이바르스는 실권을 돌려주고 [[칼리파]]에게 의존하지 않았기에 [[칼리파]]는 명목상의 존재였다. (여담이지만 바이바르스는 열심한 이슬람교 수니파였다고 한다). 이후 바이바르스는 각지로 출병하였는데, 1277년 죽을때까지 30회 이상의 출병을 벌였다고 한다.
 
[[1268년]] 훌라구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노려 북상하여 몽골에게 협력했던 십자군 국가의 여러도시를 공략하여 완전히 파괴했다. [[5월 18일]] [[안티오키아]]를 포위해 약 4일만에 함락시켜 [[안티오키아 공국]]을 멸망시켰다. 그때그 때 주민들 모두를 살해하고, 일부는 노예로 만들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것은 [[기독교]] 국가들을 자극시켜,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십자군 파병을 불러일으켰다. [[1271년]] 십자군이 침공해오자 그들과 싸우고 후에 에드워드 1세와 휴전을 맺었다. 일부 문헌에 따르면, 바이바르스는 에드워드 1세를 독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고 전해진다. 결국 에드워드는 아버지 [[잉글랜드의 헨리 3세|헨리 3세]]의 죽음으로 인해 철수했다.
 
그의 치세 동안 안티오키아뿐만 아니라, [[알레포]], 하이파, 아르스프등아르스프 등 십자군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다. 몽골에 대해선 적대하던 [[일 한국]]에 대항하기 위해 [[킵차크 한국]]과 동맹을 맺고, [[비잔티움 제국]], [[시칠리아]]와도 통상관계를 열었다. 또 카이로에서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역전제을 확립하였다. 이 역전은 카이로에서 다마스쿠스를 편도 4일 공정으로 통신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1277년]] [[아나톨리아]]의 몽골군(실제로는 몽골에게 복속한 투르크인)을 격파하고 다마스쿠스에 개선한 그 직후 복통을 호소하다 사망했다. 사망원인에 대해서는 독살설도 있으나, 과도한 음주가 원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어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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