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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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선거는 바르샤바 교외의 비엘카보라(Wielka Wola, 현재 시가지의 서부, [[보라]] 지구)에서 열렸다. 가장 불온한 선거는 1575년과 1587년의 선거로 지지자와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 언쟁이 일어났다. 선출과정이 끝나면 선거왕은 [[파크타 콘벤타]](pacta conventa;라틴어:"협정의 승인")라고 부르는 자신이 국사행위에 관련해 스스로 따르는 상세한 계약을 선거인인 귀족들과 맺는 것을 의무로서 부과 받았다. 이 계약내용에는 최초의 선거왕이었지만 잠시 통치(자신의 형인 프랑스 왕 [[샤를 9세]]가 죽자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며, 밤에 몰래 폴란드에서 도망쳐 프랑스로 갔다.)했던 [[앙리 3세|앙리 드 발루아]](Henri de Valois, 폴란드 이름은 헨리크 발레지(Henryk Walezy)의 이름에서 연유한 "[[헨리크 조항|헨리 왕의 조항]]({{llang|pl|artykuly henrykowskie}})이라고 불리는 사항이 반드시 포함되어 있었다.
 
야기에우오 왕조 최후의 국왕이었던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는 1529년 ''비벤테레게''(vivente rege, 라틴어:"전 국왕의 생존중에" 차기 후계자를 결정하는 제도)에 의해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1660년 경 [[얀 2세 카지미에슈카지미에시 바사]]의 왕비 [[루드비카 마리아 곤자가]](Ludwika Maria Gonzaga)도 이 제도를 이용하려고 시도했다. 이 절차를 노리는 것은 국왕의 정치권력의 존속성을 높이고 왕권강화정책의 일환이기도 했다.
 
1697년 이후, 국왕선거는 외국군의 군사적 압력의 아래에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자유" 선거로써의 성격을 잃었다. 가장 많은 귀족들이 참가한 것은 1573년 최초의 선거로써 이때 4만 명~5만 명이 투표했다고 했다. 2번째 투표자 숫자가 많았던 것은 그 다음 1575년 선거였으나 12,000명이 참가했을 뿐이었다.
*[[지그문트 3세 바사]] (스웨덴 출신, 재위 1587년 - 1632년)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 (재위 1632년 – 1648년)
*[[얀 2세 카지미에슈카지미에시 바사]] (재위 1648년 – 1668년)
*[[미하우 코리브트 비시뇨비에츠키]] (재위 1669년 – 1673년)
*[[얀 3세 소비에스키]] (재위 1674년 – 169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