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 (군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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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져 있다있지 않다. [[일본]]에 유학하여 [[1913년]]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1915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27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제10사단 20연대에 처음 배속 받았고, [[도쿄]]의 헌병사령부에서도 근무했다.
 
[[중일 전쟁]] 발발 당시에는 제19사단 보병 38여단 제75연대 소속이었는데, 전쟁 발발 후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의 보도부장에 임명되었다. 보도부장으로서의 역할은 지원병, 징병, 학병 제도 홍보를 통한 [[태평양 전쟁]] 지원과 언론통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보계통의 군 업무라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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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이 나오기 며칠 전부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송진우|고하 송진우]] 등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며 치안권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는데, [[8월 14일]]에 [[여운형]]을 방문하여 엔도의 말을 전하고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치안권 인계 합의를 타결시킨 사람이 정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유정 조동호 기념사업회, [http://www.chodongho.org/l03-9.htm 조동호의 활동 -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설립]</ref>
 
정훈은 일본인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가바(蒲)로 성을 바꾸었으며, 광복 후에는 일본으로일본에 가서계속 체류하면서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모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