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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년]](단종 2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오르고, 동년 사복시윤(司僕寺尹)으로 옮겼다가 [[군기감]]정(軍器監正),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를 지냈다.
 
여러 벼슬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 절충장군으로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거쳐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승진했다가 외직인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 그 뒤 [[1455년]] 형조 참의(刑曹參議), [[1456년]](세조 2년) 호조 참의호조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본처에게서 아들 자황을 얻었으며, 뒤에 첩에게서 아들 자광을 얻었다. 그의 첩이었던 [[유자광]]의 생모는 곧 따로 [[전라북도]] [[남원부]]로 분가하여 살았다.
 
[[1457년]](세조 3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외직인 [[경주시|경주]][[부윤]](慶州府尹)에 올랐는데, 소송을 제기한 자 중 경주부윤인 유규에게 뇌물을 쓴 자가 있으므로 노하여 바로 끌어다가 형장(刑杖)을 치다가 죽었다. 뇌물을 주려던 송자를 장살시킨 일로 좌죄(坐罪)되어 파직되어 [[전라북도|전북]] [[남원시|남원]](南原)으로 퇴거하였고, 이후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향아고 오랫동안 벼슬하지 않았다.
 
=== 은퇴와 죽음 ===
그뒤 서자 [[유자광]](柳子光)이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자, [[조선 예종|예종]]이 그에게 특별히 [[가정대부]](嘉靖大夫) 행 [[중추부]]첨지사(行中樞府僉知事)를 제수(除授)하여 [[한성부]]에 와서 사은(謝恩)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늙었다는 이유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그가 사직을 청하자 [[조선 예종|예종]]은 특별히 다시 승진시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제수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여 그 뜻을 이루어 주고 이어서 사는 고을에 명하여 녹봉을 주게 하였다.
 
그뒤 특별히 [[사헌부]][[대사헌]]에 제수되었다. [[1473년]] [[2월 10일]]에 [[남원]]에서 사망하니 사망당시 나이 73세였다. 유언을 내려, 그의 유언대로 상사(喪事)를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장례하게 하였다.
 
=== 사후 ===
그가 죽자 [[조선 예종|예종]]은 특별히 조회를 금지하고 하고 부의와 조제(弔祭)를 내려보냈다. [[1498년]](연산군 3년) [[8월 5일]]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에 책록되고 [[증직]]으로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성균관]] [[관상감]]사에 [[추증]](追贈)되었다추증되었다.
 
==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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