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태 (1869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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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11월 함경북도 관찰부 주사, [[1903년]] 3월 [[궁내부]]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의관을 역임했으며 [[1907년]] 11월 전라남도 흥양군 주사, [[1909년]] 7월 전라남도 영광군수를 역임했다. [[1910년]] [[10월 1일]] 전라남도 영광군수로 임명되었고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학교 설립비와 도로 공사비, 농사개량시설비 등을 기부한 대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여러 차례 목배를 받았으며 [[1913년]] [[1월 31일]] 전라남도 광주군수로 임명되었다. 1914년부터 [[1917년]] [[7월 10일]]까지 전라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역임했고 [[1915년]]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다이쇼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18년]] [[7월 1일]]부터 [[1923년]] [[6월 18일]]까지 전라남도 순천군수를 역임했으며 [[1921년]] 4월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내지 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으로 잠시 출국하기도 했다.
 
[[1922년]] [[5월 31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을 받았고받았으며 1922년 12월 28일 고등관 4등, 1923년 2월 28일 정6위에 각각 서위되었다. [[1923년]] [[7월 17일]] 특지에 의해 종5위로 승급되었으며 [[1924년]] [[4월 27일]]부터 [[1927년]] [[4월 26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 대례 기념장을 받았다.
 
[[1935년]] [[4월 13일]]에 발행된 《[[매일신보]]》에서는 그를 "전라남도 도내 굴지의 실업가로 전라남도 각 군의 군수와 중추원 참의의 요직을 역임한 인물", "노후에 고향인 고흥으로 내려온 뒤에 지방 원로로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며 재산의 일부를 사회 사업에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긴 인물"이라고 평가했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69_1_0027042&curSetPos=0&curSPos=1&isEQ=true&kristalSearchArea=P 김정태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과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