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이 마사히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크기가 바뀐 것이 없음 ,  7년 전
당시 긴테쓰는 1958년부터 1962년까지 5년 연속 리그 최하위 성적을 기록했으며 도이가 입단한 1961년에 1시즌 최다 패전 기록이 되는 103패를 기록하는 등 ‘퍼시픽 리그의 짐’이라고조차 말해질 정도의 침체를 겪었다. 1961년 시즌 종료 후 긴테쓰의 감독으로 부임한 [[벳토 가오루]]는 프로 데뷔 1년 째에 정리 대상(방출을 일컬음)에 포함된 도이의 장타력을 눈여겨보며 4번 타자로 기용했고 ‘18세의 4번 타자’라는 표현이 붙여질 정도의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2년 도이의 성적은 타율 2할 3푼 1리, 5개 홈런을 기록하면서 ‘약소 구단의 단순한 화제 만들기’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도이 자신도 중압갑에 시달려 출전 명단에서 제외해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지만 벳토 감독은 “너를 기용하고 있는 나 자신이 괴롭다. 긴테쓰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너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팀의 미래를 위해서 너는 선발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라고 거부해 도이를 선발로 계속 기용했다.
 
도이는 그 기대에 응하면서 벳토가 긴테쓰 감독 부임 3년 째가 된 1964년에는 3할 대를 밑돈 타율과 28홈런, 98타점을 남기면서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리그 최다인 168개를 기록하는 등 팀의 중심 타자로 성장하였다.성장해 그 후에도 긴테쓰의 중심 타자로서 오랫동안 활약했다. 이 일로 인해서 도이는 벳토를 스승처럼 존경했고 벳토는 도이의 결혼식 당시에 아버지가 없는 도이의 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1964년에 28개 홈런을 기록한 이후 6년 연속으로 20개가 넘는 홈런을 남겼다.
 
그러나 1970년에 도박 사건(일명 [[검은 안개 사건 (일본 프로 야구)|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1개월간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지만 다음해 1971년에는 타율 3할 9리, 40홈런, 113타점으로 개인 최고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오스기 가쓰오]]가 기록한 41홈런 때문에 단 1개 차로 홈런왕 타이틀을 놓쳤다. 이와 같이 오랫동안 팀의 중심 선수로서 활약하고 있으면서도 타격부문 타이틀(수위타자, 홈런왕, 타점왕)을 단 한 번도 차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관의 제왕’이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