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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정보
[[파일:Ulukbek01 reconstruction.jpg|thumb|울루그 베그의 두상]]
|이름 =무함마드 타라가이 빈 샤루흐
'''울루그 베그'''([[1393년]]~[[1449년]], 재위 [[1447년]]~1449년, {{llang|fa|الغ‌بیگ}})는 티무르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티무르 제국]] 제4대 군주로, 제3대 군주 [[샤 로흐]]의 장자이다.
|그림 =Ulukbek01 reconstruction.jpg
|그림 크기 =
|설명 =울루그 베그의 두상
|칭호 =울루그 베그(‘위대한 통치자’)
|본명 =میرزا محمد طارق بن شاہرخ الغ‌بیگ
|재위 =[[사마르칸드]]: [[1409년]] ~ [[1449년]]<br/>[[티무르 왕조]]: [[1447년]] ~ [[1449년]]
|대관식 =
|별명 =
|종교 =[[이슬람교]]
|출생일 =[[1393년]] [[3월 22일]]
|출생지 = [[술타니야]]
|사망일 =[[1449년]] [[8월 27일]]
|사망지 =
|매장지 =[[사마르칸트]], [[구리 아미르]]
|배우자 =
|자녀 = [[압둘 라티프]], 압둘 아지즈
|부친 =[[샤 루흐]]
|모친 =[[가우하르샤드]]
|전임자 =[[사마르칸드]]: [[할릴 술탄]]<br/>[[티무르 왕조]]: [[샤 루흐]]
|후임자 =[[압둘 라티프]]
|왕조 =[[티무르 왕조]]
|서명 =
}}
 
'''[[미르자]] 무함마드 타라가이 빈 샤루흐 울루그 벡'''([[1393년]] [[3월 22일]] [[술타니야]]에서 태어나 [[1449년]] [[8월 27일]] 죽음. 재위 [[1447년]]~1449년, {{llang|fa|میرزا محمد طارق بن شاہرخ الغ‌بیگ}}), 속칭 '''울루그 벡''' 혹은 '''울루그 베그'''는 [[티무르 왕조]]의 군주였다. 그는 [[테무르 (티무르 왕조)|테무르]]의 4남, [[샤 루흐]]의 맏아들이다. 울루그 벡이라는 명칭은 별명으로, 대략 ‘위대한 통치자’라 옮길 수 있는데, 이 칭호는 그의 할아버지 테무르가 가졌던 칭호들 중 하나였던 ‘아미리 카비르’(''Amīr-e Kabīr'')를 투르크어로 옮긴 것이다.<ref name="EI">B.F. Manz, ''"Tīmūr Lang"'', in [[Encyclopaedia of Islam]], Online Edition, 2006</ref> 그는 티무르 제국의 문화계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군주로서의 재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란이 끊이지 않았고 재위 불과 2년 8개월 만에 살해당했다.
문화인으로서 뛰어난 수학자·천문학자·역사학자로서 학자·예술가들을 우대하고 학문·예술을 보호 장려했기 때문에 수도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학예(學藝)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문화인으로서, 또 뛰어난 수학자·천문학자·역사학자로서 학자·예술가들을 우대하고 학문·예술을 보호 장려했기 때문에 수도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학예(學藝)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울루그 벡 스스로도 구면 기하학이나 삼각법 등 천문역산학에 대한 저술을 남겼기 때문에 유명하다. [[1424년]]부터 [[1429년]]까지 그는 [[사마르칸드]]에 거대한 [[울루그 벡 천문대|천문대]]를 만들었다.
 
== 어린 시절 ==
울루그 벡은 정복자 [[테무르 (티무르 왕조)|테무르]](태멀레인)의 손자이자 [[샤 루흐]]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투르크계 귀족인 [[가우하르샤드]]다. 울루그 벡은 [[페르시아]]의 [[술타니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그의 할아버지의 원정을 따라 [[중동]]과 [[인도]]를 떠돌았다. 그러나 테무르의 죽음 그리고 그의 아버지, 샤 루흐가 [[티무르 왕조|티무르 제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됨에 따라 그는 그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드]]에 정착했다. [[1409년]], 샤 루흐가 그의 수도를 [[헤라트]]로 옮기자 당시 16세였던 울루그 벡은 사마르칸드의 총독이 되었다. [[1411년]], 그는 [[마 와라 알나흐르]](트란스옥시아나) 전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 통치자로서의 울루그 베그 ==
=== 사마르칸드의 통치자 ===
[[바실리 바르톨드]]는 샤 루흐와 울루그 베그가 공동으로 트란스옥시아나를 지배했다고 묘사했으나, 근래의 많은 학자들이 이에 의문을 표했다. 샤 루흐는 티무르 가문의 여러 왕자들에게 트란스옥시아나 남부의 지배권을 주는 방식으로 울루그 베그의 지배권을 제한했다.<ref name="manz1">B. F. Manz, “Temür and the early Timurids to ''c''. 1450,” ''The Cambridge History of Inner Asia: The Chinggisid age'', N. Di Cosmo, A. J. Frank and P. B. Golden eds.(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09), p.193.</ref>
 
샤 루흐의 치세 초기에 [[카슈가르]] 지방이 [[모굴리스탄 칸국]]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샤 루흐는 꾸준히 울루그 베그에게 이 지방을 탈환할 것을 종용했다. 울루그 베그는 몇 차례의 원정에서 모굴리스탄에 지나치게 깊이 진군하기는 했으나, [[1414년]]에 결국 카슈가르 지역을 탈환했다. 이후 샤 루흐와 울루그 베그는 모굴리스탄 칸국의 복잡한 정치에 염증을 느끼며, 그것에 개입하기를 꺼렸다.<ref name="manz1"/> [[1425년]], 울루그 베그는 티무르를 본받아 모굴리스탄에 대한 원정을 감행, 이리 강 상류지방에서 거대한 경옥 2개를 사마르칸드로 가지고 와서 티무르의 묘석으로 사용했다.<ref>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이재성 옮김(서울: 민족사, 1990), pp.166-67.</ref>
 
울루그 베그는 괴뢰 칸을 사마르칸드에 상징적인 군주로 모셨다고 하여 투르크·몽골적 전통에 깊이 매료된 군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울루그 베그의 시대로 부터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쓰여진 [[무함마드 하이다르 두글라트]]의 《라시드의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며, 울루그 베그 당대의 사료에서 이와 관련된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다.<ref name="manz2">B. F. Manz, “Temür and the early Timurids to ''c''. 1450,” ''The Cambridge History of Inner Asia: The Chinggisid age'', N. Di Cosmo, A. J. Frank and P. B. Golden eds.(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09), p.194.</ref>
 
=== 티무르 왕조 전체의 지배자 ===
[[1447년]] [[3월 2일]], 샤 루흐가 죽자 울루그 베그가 그 지위를 계승했다.<ref name="그루세_울루그">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646.</ref> 이후 울루그 베그는 자신이 발행하는 동전에 할아버지, 티무르의 이름을 덧붙였다.<ref name="manz2"/>
 
그러나 [[1449년]]에 발흐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압둘 라티프]]에 의해 감금되었는데, 압둘 라티프는 [[1449년]] [[10월 27일]]에 울루그 벡을 처형했다.<ref name="그루세_울루그"/> 소련의 조사에서 울루그 베그의 유골은 머리와 몸통이 따로 있었던 것이 발견됨으로서 그의 비극적인 최후가 실증되었다.<ref>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이재성 옮김(서울: 민족사, 1990), p.262, n.1.</ref> 울루그 베그의 죽음으로 티무르 가문의 내전기가 다시금 도래하였다.<ref>르네 그루세,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서울: 사계절, 1998), p. 647.</ref>
 
== 문화에 대한 기여 ==
10대의 지배자, 울루그 베그는 제국의 옛 수도를 제국의 지적 활동의 중심지로 바꾸었다. 1417년부터 1420년까지 그는 사마르칸드의 [[레기스탄 광장]]에 [[마드라사]]를 짓고, 그곳에서 연구할 무슬림 천문학자들과 수학자들을 초빙했다. 이 마드라사는 아직도 남아있다. 천문학자들 가운데 울루그 벡의 가장 유명한 식객은 [[알리 쿠쉬치]]([[1474년]] 죽음)이다.
 
울루그 베그 스스로도 천문학, 역사, 문학 등의 분야에서 저술을 남겼다.<ref name="나가사와_울루그">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이재성 옮김(서울: 민족사, 1990), pp.167.</ref> 그는 역사가로서 《사한국사(四汗國史)》를 남겼다고 하며, 그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제작한 〈울루그 베그의 천문표(天文表)〉는 무슬림들의 그것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ref>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이재성 옮김(서울: 민족사, 1990), p.260, n.8.</ref> 이러한 울루그 베그를 당대의 사람들은 그가 옥좌에 있는 학자라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까지 비유하였다.<ref name="나가사와_울루그"/>
 
== 각주 ==
<references/>
 
그러나 군주로서의 재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내란이 끊이지 않았고 재위 불과 2년 8개월 만에 살해당했다.
 
{{글로벌}}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