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홍 (188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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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3월 평안북도 의주군 광성면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18년]] 12월 평안북도 신의주부 관선 부협의회원, [[1920년]] 11월 신의주부 부회의원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조선노동대회 신의주지부장(1920년 11월)과 서선통산주식회사 이사(1921년 ~ 1931년), 신의주 공립보통학교보호자회 의원(1924년 5월), 조선불교 신의주지부 고문(1925년 11월 ~ 1926년 1월), 신의주금융조합 평의원(1926년 4월), 신의주 시장건설사업 발기인(1927년 6월), 신의주 원대조합장(1929년 10월 ~ 1937년 1월), 압록강토지개량주식회사 사장(1933년 4월 ~ 1943년 11월) 등을 역임하는 동안 평안북도 신의주 지역 유력자로 성장했고 [[1930년]] 2월과 [[1939년]] 2월 동아일보 신의주지국 고문을 역임했다.
 
[[1937년]] [[7월 26일]] 평안북도에 국방헌금으로 2,000원을 기부했으며 같은 해 [[7월 29일]] 재단법인 조선나(癩)예방협회기금으로 1,000원을 기부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았다. 1938년 4월 주식회사 매일신보사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38년 4월 20일부터 1941년 4월 19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1938년 5월 평안북도 육군특별지원자채용시험 진행금으로 1,000원을 기부했으며 1938년 1월 19일과 1940년 1월 9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지원병 제도 실시 강화를 주장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12월 15일]] 해군국방기재비로 10,000원을 기부했다.
 
1938년 5월 평안북도 육군특별지원자채용시험 진행금으로 1,000원을 기부했으며 1938년 1월 19일과 1940년 1월 9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지원병 제도 실시 강화를 주장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 [[12월 15일]] 해군국방기재비로 10,000원을 기부했다.
 
[[1942년]] 5월 평안북도 신의주남공립고등여학교 증축비로 10,000원을 기부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을 받았으며 [[1944년]] [[5월 19일]]에도 제국재향군인회 신의주지부 교육자금으로 10,000원을 기부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감수포장을 받았다. 광복 이후인 [[1950년]] [[4월 2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과 지역유력자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