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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6월부터 1930년대 초 중반까지 잡지 《신민(新民)》의 발행 겸 편집인을 맡았다. [[1936년]] 2월 전향자 출신 인사들이 결성한 황국신민화 단체인 백악회(白岳會)를 조직했고 같은 해 7월에는 백악회를 확대 개편한 단체인 대동민우회를 조직했다.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 촉탁과 경성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를 겸직하는 한편 1937년 이후부터 시국강연회, 시국대응강연회, 시국유지원탁회의 등에 참석하여 국민정신총동원과 내선일체를 적극 주장했다.
 
[[1938년]] 조선방공협회 경기도 연합지부 평의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를 역임했으며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무이사, 발기인, 참사, [[1940년]] 대동일진회 고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평의원을 역임했다. [[1941년]] [[8월 25일]]]에 열린 [[임전대책협의회]] 좌담회에서 《황도정신과 총력》이라는 주제의 글을 발표했으며 같은 해 [[9월 7일]] 임전대책협의회가 결성한 채권가두봉공대 남대문대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과 평의원을 역임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대동민우회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방위지도부 참사, 의례개선조사위원, [[1943년]]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후생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인 [[1949년]]에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서울]]에서 반민특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일본의 패망 이후에 생긴 충격으로 정신이상 상태가 된 것으로 판정이 나면서 풀려났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의 기타 부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2005년]] 고려대학교 교내 단체인 일제잔재청산위원회가 발표한 '고려대 100년 속의 일제잔재 1차 인물' 10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ref>{{뉴스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