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훈 (군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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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 전쟁]] 발발 당시에는 함경북도 회령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 보병 38여단 제75연대 소속이었고, 전쟁 발발 후 [[조선군사령부]] 보도부의 보도부장에 임명되었다. 보도부장으로서의 역할은 지원병, 징병, 학병 제도 홍보를 통한 [[태평양 전쟁]] 지원과 언론 통제였다. 일본군 현역 장교로 복무 중이던 [[1941년]] 8월 [[조선문인협회]] 평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8년]]에 시행된 지원병제 공포에 즈음하여 《[[매일신보]]》에 이를 경축하는 글을 보냈고, 지원병 모집을 위한 담화문을 싣기도 했다. 당시 계급은 소좌였고, 조선군 보도반과 보도부, 병무부 소속이었다. [[1942년]] 육군 중좌로 진급했다진급했고, [[1944년]] 초에는 조선군 병무부(兵務部)에서 복무했다.
 
[[1945년]] [[8월 15일]] [[쇼와 천황]]의 항복 선언이 나오기 며칠 전부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는 [[송진우|고하 송진우]] 등 유력 인사들과 접촉하며 치안권 인수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는데, [[8월 14일]]에 [[여운형]]을 방문하여 엔도의 말을 전하고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한 치안권 인계 합의를 타결시킨 사람이 정훈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f>유정 조동호 기념사업회, [http://www.chodongho.org/l03-9.htm 조동호의 활동 -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설립]</ref> 정훈은 일본인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가바(蒲)로 성을 바꾸었으며, 광복 후에는 일본에 계속 체류하면서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정훈은 일본인에게 양자로 입적되어 가바(蒲)로 성을 바꾸었으며, 광복 후에는 일본에 계속 체류하면서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모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