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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2월 14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았고 [[1939년]] [[3월 15일]]부터 [[1940년]] [[9월 1일]]까지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을 역임했다. [[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1939년 4월 17일 임명),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간사(1939년 4월 20일 임명), 조선총독부 금강산탐승시설조사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자원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농촌진흥위원회 위원 겸 간사, 조선총독부 저축장려위원회 간사,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 조선총독부 박물관건설위원회 간사(1939년 4월 24일 임명), 조선미술심사위원회 간사(1939년 4월 28일 임명), 조선총독부 내무국 지방관리양성소 강사(1939년 5월 5일 임명),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제1부원 및 제2부원) 겸 간사(1939년 5월 8일 임명), 조선총독부 학무국 교학연수소 강사(1939년 6월 13일 임명), 조선총독부 중견청년수련소 강사(1939년 8월 1일 임명) 등을 역임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으며 [[1942년]] [[2월 20일]] 남작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계급인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40년]] [[9월 2일]]부터 [[1942년]] [[1월 23일24일]]까지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했으며 1940년 10월 16일부터 1942년 1월 23일까지 국민총력전라북도연맹 회장을 역임했다. [[1941년]] 3월 잡지 《[[조광]]》에 실린 글에서 조선 동포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구현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는 한편 국민총력운동 강화를 통한 고도국방국가체제 확립을 위해 매진할 것을 주장했다.
 
[[1943년]] [[2월 16일]]부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으며 1944년 6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5년 2월 11일 [[대화동맹]] 심의원, 1945년 6월 24일 [[대의당]] 위원을 역임했다. 1943년 11월 [[충청남도]]에서 임시특별지원병제의 취지를 선전했으며 [[1944년]] 5월 하순부터 6월 중순까지 조선인 학병이 입대해 있던 일본 현지 부대를 격려 방문한 뒤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학병, 징병, 징용을 선전, 선동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1월 2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고 1949년 4월 18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지만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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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수 = 11
|직책 = [[전라북도|전라북도 도지사]]
|임기 = 1940년 9월 2일 ~ 1942년 1월 23일2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