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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부 종로경찰서 도경부(1919년 7월 임명), 평안남도 도경시(1920년 8월 12일 임명),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1921년), 경기도 도경시(1925년 1월 15일 임명), 경기도 경찰부 형사과장(1925년 2월 5일 ~ 1929년), 경기도 도경시 겸 순사교습소 교관(1925년 7월 4일 ~ 1929년)으로 근무한 뒤 경찰직에서 퇴직했고 [[1928년]] [[1월 20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서보장, 1928년 11월 16일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다. 경성부 종로경찰서 재직 시절 미즈노(水野)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특명을 받은 뒤 중국 상하이에 파견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의 동태를 파악했다는 기록이 있다.
 
[[1930년]] 2월 경기도 진위군수로 임명되었고임명된 뒤부터 행정관료로 근무했으며 [[1932년]] [[1월 25일]] 경기도 경성부 부이사관(府理事官) 겸 서무과장, 1932년 6월 6일 경성부 부이사관 겸 사회과장으로 각각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19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5등 서보장을 받았으며받았고 [[1934년]] [[4월 29일]] [[만주 사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하사금을 받았다. [[1935년]] [[4월 1일]] 조선총독부 평안북도 참여관으로 임명되었고임명되었으며 1935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표창과 은배 1조를 받았다. [[1937년]] 2월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임명된 뒤 전라남도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1937년 2월 ~ 1938년 6월), 전라남도 도농회장(1937년 3월 ~ 1938년 6월),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1937년 4월 ~ 1938년), 전라남도방공위원회 위원(1938년 3월 ~ 1938년 7월) 등을 역임했으며 [[1938년]] [[1월 3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사를 통해 일본 천황의 만수무강과 국운의 융성을 기원하고 총후의 책무 완수를 강조했다.
 
[[1937년]] 2월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으로 임명된 뒤 전라남도지방미곡통제조합연합회 회장(1937년 2월 ~ 1938년 6월), 전라남도 도농회장(1937년 3월 ~ 1938년 6월),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1937년 4월 ~ 1938년), 전라남도방공위원회 위원(1938년 3월 ~ 1938년 7월) 등을 역임했으며 [[1938년]] [[1월 3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사를 통해 일본 천황의 만수무강과 국운의 융성을 기원하고 총후의 책무 완수를 강조했다. 1938년 6월 23일부터 1939년 3월 14일까지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 1940년 9월 2일부터 1942년 1월 23일까지 전라북도지사를 역임하는 동안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1939년 3월 15일 ~ 1940년 9월 1일),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참사 겸 간사(1939년 4월 임명), 국민총력전라북도연맹 회장(1940년 10월 ~ 1942년 1월) 등을 역임했으며 [[1939년]] [[2월 14일]]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전라남도 참여관 재직 시절 [[기독교]]계 학교를 강제로 교묘한 방법으로 폐쇄시키는 한편 군수물자의 공출 및 조달, 각종 헌금 및 위문금품 모집, 국방사상 보급 및 선전 등을 주도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전라남도 참여관 재직 시절 [[기독교]]계 학교를 강제로 교묘한 방법으로 폐쇄시키는 한편 군수물자의 공출 및 조달, 각종 헌금 및 위문금품 모집, 국방사상 보급 및 선전 등을 주도하여 일본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4월 29일]] [[중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소수장을 받았고 [[1942년]] [[2월 20일]] 남작에 준하는 예우를 받는 계급인 종4위에 서위되었다. [[1941년]] 3월 잡지 《[[조광]]》에 실린 글에서 조선 동포의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 구현이 시급한 과제임을 강조하는 한편 국민총력운동 강화를 통한 고도국방국가체제 확립을 위해 매진할 것을 주장했다. 1942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실린 신년사를 통해 순국정신을 발휘하고 총후전사로서의 본분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1943년]] [[2월 16일]]부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는 한편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4년 6월), [[대화동맹]] 심의원(1945년 2월), [[대의당]] 위원(1945년 6월)으로 활동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이던 1943년 11월 [[충청남도]]에서 임시특별지원병제의 취지를 선전했으며 [[1944년]] 5월 하순부터 6월 중순까지 조선인 학병이 입대해 있던 일본 현지 부대를 격려 방문한 뒤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학병, 징병, 징용을 선전, 선동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1월 2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고 1949년 4월 18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지만 1949년 8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도지사 부문, 도 참여관 부문, 중추원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애국자 살상자 부문, 경시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친일단체 부문, 경찰 부문,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43년]] [[2월 16일]]부터 [[1945년]] 8월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는 한편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1944년 6월), [[대화동맹]] 심의원(1945년 2월), [[대의당]] 위원(1945년 6월)으로 활동했다. 중추원 참의로 재직 중이던 1943년 11월 [[충청남도]]에서 임시특별지원병제의 취지를 선전했으며 [[1944년]] 5월 하순부터 6월 중순까지 조선인 학병이 입대해 있던 일본 현지 부대를 격려 방문한 뒤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학병, 징병, 징용을 선전, 선동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1월 2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고 1949년 4월 18일에 열린 결심공판에서 징역 7년을 구형받았지만 1949년 8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도지사 부문, 도 참여관 부문, 중추원 부문, 조선총독부 사무관 부문, 애국자 살상자 부문, 경시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친일단체 부문, 경찰 부문, 관료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참고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