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우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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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普愚: [[1301년|1301]]~[[1382년|1382]])는 [[고려]] 말의 고승으로 [[불교]] 개혁에 힘쓴 [[승려]]이다. 호는 태고(太古){{.cw}}보허(普虛)이며, 속성은 홍(洪)씨이고 시호는 원증(圓證)이다.<ref name="글로벌-보우">[[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사/중세사회의 발전/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고려 후기의 문화#보우|한국사 > 중세사회의 발전 > 고려 후기의 사회와 문화 > 고려 후기의 문화 > 보우]],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ref name="글로벌-보우3">[[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고려시대의 불교사상#보우|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고려시대의 사상 >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 보우]],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흔히 '''태고'''(太古) 또는 '''태고국사'''(太古國師)라 불린다.
 
고려 말기에 [[고려]]는 [[몽골]]([[원나라|원]])의 재침략을 받고, 이어 그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에 따른 불교 교단의 타락과 오랫동안 쌓여온 기복불교(祈福佛敎)의 폐단은 마침내 [[고려]] 사회에 [[배불]](排佛)의 싹을 마련하고 있었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동양사상/한국의 사상/고려시대의 사상/고려시대의 불교사상#보우의 9산통합|동양사상 > 한국의 사상 > 고려시대의 사상 > 고려시대의 불교사상 > 고려시대의 불교사상〔槪說〕 > 보우의 9산통합]],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ref> 한편 [[원나라]](元)의 쇠퇴는 [[공민왕]]에게 정치적 자주성을 되찾을 기회를 주어, 그는 과감히 복고정치를 수행해 갔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보우(普愚)와보우와 [[혜근]](惠勤: [[1320년|1320]]~[[1376년|1376]])은 이러한 세상에 출현하여 [[임제종]](臨濟宗)의 선풍(禪風)으로 불교를 일상 현실속에 살리려고 하였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이들 중에서도 보우는 특히 이러한 사상을 강하게 나타내어 [[9산]]의 통합을 시도하여 그 과제를 [[조선]]대에 넘겨 주었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공민왕]]이 뒤에 요승 [[신돈]](辛旽)을 기용하여 정치를 잘못함에 따라 [[배불]](排佛)의배불의 기운이 비등하였고 고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이에 [[불교]]도 운명을 함께 하여 조선의 국가적인 배불정책에 의해 조선 시대 전반적으로 탄압과 쇠락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보우와 [[혜근]]을 함께 이은 [[혼수]](混修)의 법맥이 [[조선]]에 이어졌다.<ref name="글로벌-보우의 9산통합"/>
 
== 생애 ==
[[홍주]](洪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출신. 아버지는 홍연(洪延), 어머니는 정씨이며, 해가 품에 들어오는 태몽이 있었다.
 
13세([[1313년]])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얼마 뒤 [[가지산]](迦智山)으로 가서 수행하였다.<ref name="글로벌-보우"/>
 
25세([[1325년]], [[충숙왕]] 12년)에 [[승과]](僧科)인 화엄선(華嚴選)에 급제했으나 명리(名利)를 버리고 [[감로사]](甘露寺)에서 고행(苦行)을 하였다.<ref name="글로벌-보우"/><ref name="글로벌-보우3"/>
 
[[삼각산]]에 [[태고사 (고양시)|태고사]](太古寺)를 지었고, [[1346년]]([[충목왕]] 2년) [[원나라]]에 가서 하무산(霞霧山) [[청공]](淸珙)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臨濟宗)의 시조(始祖)가 되었다.<ref name="글로벌-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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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및 활동 ==
보우는 [[대각국사 의천]]이 치선(痴禪)이라고 갈파한 [[9산]](九山)을 통합하고 구이지학(口耳之學)을 지양(止揚)하고자 [[원융부]](圓融府)를 건립하고 선사(先師)의 품법(稟法)으로 전(全) 불교를 총섭(摠攝)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ref name="글로벌-보우2"/>
 
보우는 일찍이 [[만법귀일]](萬法歸一){{.cw}}[[무자]](無字)와 같은 [[화두]]를 [[참선]]하여 크게 깨친 바가 있었지만, 충목왕 2년에 다시 [[중국의 불교|중국]]에 건너가([[충목왕]] 2년), [[임제]](臨濟)의 17대 법손 [[석옥]](石屋)으로부터 법을 받고 돌아왔다([[충목왕]] 4년)4년에 돌아왔다.<ref name="글로벌-보우3"/>
 
그러나 그는 절에 머물지 않고 [[광주시 (경기도)|광주]](廣州) [[소설산]](小雪山)에서 경작에 힘썼다.<ref name="글로벌-보우3"/> [[공민왕]]이 그를 불러 법을 물었을때, 보우는 임금의 길은 불교신앙(信佛)에 있지 않고 밝은 정치에 있다고 하였다(《[[고려사]]》권 38).<ref name="글로벌-보우3"/>
 
그리고 [[선종 9산]]을 통합하여 [[임제종]]의 [[백장청규]](百丈淸規)로써 기강을 바로잡고, [[개경]]은 왕기(王氣)가 다했으니 복고정치가 어려우므로 [[한양]](漢陽)으로 천도할 것을 아뢰었다《[[유창선도증국사행장]](維昌撰圖證國師行狀)》(공민왕 5년).<ref name="글로벌-보우3"/> [[공민왕]]은 보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곧 [[광명사]](廣明寺)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9산]] 통합에 착수하였고, [[한양]]에 궁절을 짓게 하였다.<ref name="글로벌-보우3"/> 그러나 [[한양]] [[천도]]는 일부 신하가 [[묘청]]의 예를 들어 반대하므로 좌절되고, 이와 함께 [[원융부]]도 불과 10개월만에 해체되고 말았다.<ref name="글로벌-보우3"/>
 
[[9산]] 통합과 [[한양]] [[천도]] 계획은 실패에 돌아갔지만, 이러한 보우의 행장(行狀)에서 그가 얼마나 현실적인 사상가였던가를 알 수 있다.<ref name="글로벌-보우3"/> [[한양]] [[천도]]는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를 쇄신하려는 것이었으며, [[천도]]의 이유로 든 [[풍수지리설]]은 당시의 풍조를 현실적으로 이용하려 한 것이었다.<ref name="글로벌-보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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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둘러보기}}
 
[[분류:고려의 승려]]
[[분류:과거 급제자]]
[[분류:1301년 태어남]]
[[분류:1382년 죽음]]
[[분류:고려의 승려]]
[[분류:과거 급제자]]
 
[[no:Taego B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