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혜왕: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Holyedu (토론 | 기여)
2번째 줄:
== 생애 ==
[[위 무후]](魏武侯)의 적자로 태어났다. 패권 국가인 위나라가 무후의 사후, 이복형 공자 중완(公子仲緩, 위완(魏緩))과 왕위 다툼에 이겨 즉위 하였다. 위나라는 중원 대륙 중앙에 위치하여, 당시 최대의 세력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주위에 강국들이 둘러싸여 있어 무후의 재위 말기에는 영토 확장에확장을 위해서는 타국으로 쳐들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끊어지지 않는 전쟁이 국정이 암울하게 있었다.
 
즉위를즉위 이후에는 [[조 (전국)|조나라]](趙)와 제나라의 개입을 허락하였고, [[진나라]](秦), [[송 (춘추 전국)|송나라]](宋), [[한 (전국)|한나라]](韓)등과도 싸움이 끊임그칠 없고날이 없었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것에것이 불안한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러한이에 대한 해결 안으로, 공족인 재상 [[공숙좌]](公叔座)가 임종 직전에직전, 자신의 세객인 [[상앙|공손앙]](公孫鞅)을 추천 하여추천하며, "내가신이 죽은 후에, 세객인 공손앙을 재상으로 삼아주십시오. 반드시 위나라를 강대국으로 만들어 줍니다줄 것입니다. 만약, 이 자를이자를 등용해 주시지 않는 경우에는, 지금이라도 공손앙을 살해를죽여서 부탁드립니다후환을 없애야 하나이다. 만약 타국이 등용해 버리면, 위나라에 대해대단히 높은 위협이 되어, 기회가 다하지 않기 때문에것입니다"라고 유언 했지만유언하였으나, 양혜왕은혜왕은 공숙좌가 모독자신을 하여모독하여 이런 일을 말하는 것으로것이라 생각하고, 이것을이를 듣지 않고 공손앙을 등용도 살해도등용하지도, 하지살해하지도 않았다.
 
양혜왕의혜왕의 말을 듣고 실망한 공손앙은 진나라에진나라로 가고,떠나 [[진 효공]](秦孝公) 찾아가서 진나라의 재상이재상으로 되어등용되어 [[변법]]을 추진하였고, 이를 통해 진나라의 국정을 크게 개혁하여개혁, 순식간에진나라는 강국이 되었다. 이 공적으로 의해서인해 공손앙은 상(商)이라는 땅에지역을 봉해지고영지로 상앙으로받고, "상앙"으로 불리게 된다. 강국이 된 진나라가진나라는 종종의수시로 침공에위의 의해국경을 넘어섰고, 위나라는진의 침공으로 위는 서서히 영토를 줄어지게빼앗기게 된다.
 
[[기원전 341년]], 그것을[[마릉 호기라고전투]]에서 포착한위나라군은 진나라의[[전기]]·[[손빈]]이 상앙이지휘하는 제나라군에 다음대패하였다. 해의 전투로 상장군 [[방연]]이 전사하고, 혜왕의 적자 [[태자 신]](太子 申)이 포로로 사로잡히는 엄청난 패배를 당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진나라의 상앙은 이듬해([[기원전 340년]]), 재빠르게 서쪽으로 침공해,침공하였다. 상앙은 상앙와그와 친교가 있던 총대장 공자 앙(公子 卭) 속여, 공자 앙을 포로로 잡아 대승했기대승을 때문에거두었고, 위나라는 도읍을전쟁의 안읍에서여파로 위는 [[안읍]]에서 동쪽인 대량(大梁)으로 천도하였다.천도하게 되었다. 이후, 위나라는위는 대량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이와 같이같은 패전의 소식으로 실의에 있던잠겨있던 혜왕은 몹시 사랑함 한 태자 신의 동복 동생 [[공자 혁]](公子 赫)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동시에 양혜왕은혜왕은 "그 때 공숙좌의 말을 듣고, 공손앙을 처형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을것이다" 라고 말을 하고하며, 상앙을 죽이는죽이지 못한 것을 많이 후회했다고 한다.
[[기원전 341년]], 마릉 전투에서 위나라군은 전기·손빈이 인솔하는 제나라군에 패배하고 혜왕의 적자 [[태자 신]](太子申)을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한다.
 
거듭되는 패전에 의해, 위나라는위는 점차 쇠약해져 한나라와한과 함께 제나라에제에 복속하게 되어, [[위 문후]](魏文侯)이후 계승되었던지속적으로 계승되어 오던 전국의 패권을 잃게 되었다. 양혜왕은혜왕은 [[기원전 319년]]에 노쇠 하여서숙환으로 82세에82세의 사망나이에 했다사망했다.
또, 그것을 호기라고 포착한 진나라의 상앙이 그 다음 해의 [[기원전 340년]]에 재빠르게 서쪽으로 침공해, 상앙와 친교가 있던 총대장 공자 앙(公子卭)를 속여, 공자 앙을 포로로 잡아 대승했기 때문에, 위나라는 도읍을 안읍에서 동쪽인 대량(大梁)에 천도하였다. 그 이후, 위나라는 대량이라고도 불리게 된다. 이와 같이 실의에 있던 혜왕은 몹시 사랑함 한 태자 신의 동복 동생 [[공자 혁]](公子赫)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동시에 양혜왕은 "그 때 공숙좌의 말을 듣고, 공손앙을 처형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 것을"라고 말을 하고, 상앙을 죽이는 것을 많이 후회했다고 한다.
거듭되는 패전에 의해, 위나라는 쇠약해져 한나라와 함께 제나라에 복속하게 되어, [[위 문후]](魏文侯)이후 계승되었던 패권을 잃게 되었다. 양혜왕은 [[기원전 319년]]에 노쇠 하여서 82세에 사망 했다.
 
== 가족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