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천옹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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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관계하는 여성들에게 이 병을 옮기기도 하였다. 당시 다른 여성들은 충혜왕의 정력을 감당해내지 못하였는거나 임질에 걸려 고생했는데, 은천옹주만은 이러한 충혜왕과 죽이 잘 맞고 충혜왕을 능히 감당해내어 더욱 사랑을 받았다<ref name="han"></ref>. 이런 은천옹주가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충혜왕이 시장에서 포백(布帛)을 강탈하여 폐백으로 주기도 했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5COc_A9999_2_0008806&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B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 〈은천옹주〉항목]</ref>.
 
은천옹주는 사치가 심한 성품으로, [[고려 충혜왕|충혜왕]]으로 하여금 자신이 거처할 신궁을 짓게 하였다<ref name="han"></ref>.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당시 [[고려 충혜왕|충혜왕]]은 신궁 건축에 동원된 무리들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나희]](儺戱), [[춤]] 등을 경연하게 하면서 시상을 하였는데, 이때 은천옹주도 50냥을 보태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신궁을 지을 때 은천옹주의 명으로 [[맷돌]]과 [[디딜방아]]를 많이 놓게 하였다. 하지만 이해 [[음력 11월]]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잡아가면서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도 모두 끝이 난다. 이때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끌고 가는데, 충혜왕이 예복만 입은 것을 슬퍼한 은천옹주는 고용보에게 간청하여 충혜왕에게 [[갖옷]]<ref>구의(裘衣)라고도 하며, 짐승가죽으로 만든 옷을 말한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576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갖옷〉항목] 참고</ref>을 바쳤다. 은천옹주는 충혜왕이 끌려간 후 충혜왕의 다른 궁인들 120여 명과 함께 곧바로 궁에서 추방되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a004&gunchaId=av025&muncheId=03&finId=013&NodeId=&setid=1903212&Pos=1&TotalCount=4&searchUrl=ok 《고려사절요》권25 - 충혜왕]</ref>.
 
===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