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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11월 1일]]부터 [[1927년]] [[2월 1일]]까지 매일신보 대구지국장을 역임했으며 지국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운 점을 인정받아 매일신보사로부터 은시계 1개와 은배 1개를 받기도 했다. [[1919년]] 4월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조직된 대구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0년]] 3월 [[유도진흥회]] 경상북도지부 총무를 역임했다.
 
1920년과 1926년 두 차례에 걸쳐 경상북도 유림내지시찰단(儒林內地視察團, 1920년 10월 22일 ~ 1920년 11월 10일, 1926년 3월 4일 ~ 1926년 3월 20일)에 참가하여 일본 현지를 시찰했으며 1926년 3월에는 시찰단의 동정을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1920년 12월 [[국민협회]] 경북지부 평의원, [[1924년]] 4월 국민협회 본부 평의원을 역임했고 1927년 2월 매일신보사 촉탁으로 근무했다.
 
[[1927년]] [[6월 3일]]부터 [[1930년]] [[6월 2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1928년]] [[11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쇼와대례기념장을 받았으며 1930년 6월 2일 정7위에 서위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