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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각리서당(角里書堂)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1890년]] 3월 대구 지역의 여러 유생소(儒生所)에서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1905년]] 7월부터 [[1907년]] 5월까지 대구 광문사장으로 재직했고 1907년 [[대한자강회]] 회원, 1908년 대한협회 대구지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08년]] 9월부터 [[1909년]] 3월까지 대구 사립보명학교(私立普明學校) 교장을 역임했으며 [[1911년]] 5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주최한 일본 시찰단에 참가했다.
 
[[1913년]] [[11월 1일]]부터 [[1927년]] [[2월 1일]]까지 매일신보매일신보사 대구지국장을 역임했으며 지국장대구지국장 재직 시절 지국 발전에 큰 공로를 세운 점을 인정받아 매일신보사로부터 은시계 1개와 은배 1개를 받기도 했다. [[1919년]] 4월 [[3·1 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조직된 대구자제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20년]] 3월 [[유도진흥회]] 경상북도지부 총무를 역임했다.
 
1920년과 1926년 두 차례에 걸쳐 경상북도 유림내지시찰단(儒林內地視察團, 1920년 10월 22일 ~ 1920년 11월 10일, 1926년 3월 4일 ~ 1926년 3월 20일)에 참가하여 일본 현지를 시찰했으며 1926년 3월에는 시찰단의 동정을 《[[매일신보]]》에 게재했다. 1920년 12월 [[국민협회]] 경북지부 평의원, [[1924년]] 4월 국민협회 본부 평의원을 역임했고 1927년 2월 매일신보사 촉탁으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