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공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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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한글
|인용 =
}} </ref> [[1909년]] 형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에 연좌되어 [[조선총독부]]의 탄압을 받다가 [[러시아]]로 망명, 러시아 교민들을 지도하였으며 [[192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러시아]] 대사로 임명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한때 [[이동휘]], [[김규식]] 등을 따라 [[모스크바]]에 동행, [[레닌]]으로부터 지원금 교부를 위해 노력했다.

그뒤 [[한국독립당]], [[한인애국단]]의 재정 담당으로 활동하였으며 '''[[김구]]'''의 최측근이었으나, 자금 문제와 형 '''[[안중근]]'''의 가족 이주 문제로 '''[[김구]]'''와 갈등하던 중 암살되었다. '''[[안중근]]'''·'''안정근'''의 동생이며 '''안태훈'''의 아들이다. 본관은 [[순흥 안씨|순흥]](順興)이고 [[천주교]] 영세명은 [[요한]], 호는 신암(信庵)<ref name="뉴시스">
{{뉴스 인용
|저자 = 서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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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
}} </ref>이다. [[1937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의원이었으며, [[중일전쟁]] 직후 형 [[안중근]] 부인 김아려와 가족을 데려오지 못한 일로 [[김구]]에게 심한 질책을 당한 뒤 결별하였다. [[1939년]] [[5월 30일]] 살해되었으나 암살의 배후는 미궁이다. [[황해남도]] 출신이며 가명으로는 '''서이로'''(西利潞)·'''신암'''(信庵)·'''안삼재'''(安三才)·'''조한용'''(趙漢用)·'''장진구'''(張震球) 등을 사용하였다.
 
== 학력 ==
* [[황해도]] [[신천군|신천]] 계몽보통학교 수료
* [[황해도]] [[신천군|신천]] 삼흥보통학교 수료
* [[황해도]] [[해주시|해주]] 신진보통학교 졸업
* [[평안남도]] [[진남포]]고등보통학교 수료
* [[경성사범학교]] 졸업
 
==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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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
}} </ref>
 
[[1920년]] [[12월]] 상하이 한인거류민단의사회 의원이 되고, [[192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황해도 지역구 의원이 되었다.
 
[[1921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주러시아 대사에 임명되어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외교를 벌였다.<ref name="조선닷컴" /><ref name="대전일보" />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으며, 상해 교민단, 독립운동 촉성회, 한국독립당 등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이때 형 [[안정근]]은 [[안중근]], [[안정근]] 등과 사적인 인연이 있던 도산 [[안창호]]와 친하게 지내며 형님, 동생이라며 호형호제 하였지만 그는 [[안창호]]를 멀리하고 [[김구]]를 가까이 하였다. 이후 그대로 [[김구]]의 측근이 되어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의거 자금과 무기를 마련하였다.
 
==== 러시아 활동과 귀환 ====
[[1922년]] [[5월]] [[러시아]] 정부에 구두보고를 보내 [[3.1운동]]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소비에트정부의 '''[[이동휘]]'''대한 지나친 믿음은 잘못된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중에서 '''[[이승만]]'''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설명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283~284p</ref><ref>고정휴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고정휴, 2006,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92~93p</ref> [[1924년]] [[2월]] 가족과 함께 [[중국]] [[북경|베이징]]으로 이주했고 [[1925년]] 가족들을 이끌고 위해위로 요양하러 떠났다.<ref name=autogenerated2>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4p</ref> [[1926년]] '''안원생'''(형 '''안정근'''의 장남)과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7p</ref> 1926년 [[상하이]] 한인교민단장에서 물러난 [[여운형]]을 대신하여 상하이 한인 교민단장에 선출되었다.
[[1922년]] [[5월]] [[러시아]] 정부에 구두보고를 보내 [[3.1운동]]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소비에트정부의 '''[[이동휘]]'''대한 지나친 믿음은 잘못된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중에서 '''[[이승만]]'''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설명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283~284p</ref><ref>고정휴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고정휴, 2006,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92~93p</ref> [[1922년]]에는 한때 [[이동휘]], [[김규식]] 등을 따라 [[모스크바]]에 동행, [[레닌]]으로부터 군자금 잔액 140만 루불을 지원받기 위해 노력했으나 성과없이 되돌아왔다.
 
[[1922년]] [[5월]] [[러시아]] 정부에 구두보고를 보내 [[3.1운동]]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상을 소개하고, 소비에트정부의 '''[[이동휘]]'''대한 지나친 믿음은 잘못된 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임시정부의 지도자들 중에서 '''[[이승만]]'''의 활동을 긍정적으로 설명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283~284p</ref><ref>고정휴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고정휴, 2006,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92~93p</ref> [[1924년]] [[2월]] 가족과 함께 [[중국]] [[북경|베이징]]으로 이주했고 [[1925년]] 가족들을 이끌고 위해위로 요양하러 떠났다.<ref name=autogenerated2>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4p</ref> [[1926년]] '''안원생'''(형 '''안정근'''의 장남)과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7p</ref> 1926년 [[상하이]] 한인교민단장에서 물러난 [[여운형]]을 대신하여 상하이 한인 교민단장에 선출되었다.
 
[[1926년]] [[5월]] [[상하이]]에서 [[이유필]], [[최창식]], [[오영선]] 등과 함께 독립운동촉진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고, "한국 민족의 해방을 촉성하고, 철저한 독립운동가의 조직적 대단결의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해 [[5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령직을 사퇴한 '''[[양기탁]]'''의 후임으로 '''[[안창호]]'''를 국무령에 선임하자, 기호파의 중심인 '''안공근''', '''[[김규식 (1881년)|김규식]]''', '''[[김구]]''', '''김보윤'''(金甫潤) 등은 서북파인 '''안창호'''가 국무령이 되는 것을 반대하였다.<ref name="oh288">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 (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88페이지</ref> [[안창호]]의 측근들은 그에게 지지를 호소하였지만 그는 안창호 지지를 거부하였다. 결국 '''안창호'''는 국무령에 선출된지 13일만에 사퇴하여 사태를 수습하였다.
 
[[1926년]] [[10월]]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촉성회가 구성되고 [[1927년]] [[4월]] 상하이에서는 전민족독립당이 창당되었다. 그런데 [[공산주의]]자인 [[홍남표]], [[정백]] 등이 전민족독립당을 공산, 사회주의자들이 장악하려 하자, 그는 참여를 거부하고 탈퇴하였다. 그러나 그가 참석을 거부했는데도 전민족독립당에서는 계속 집행위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을 두고 있었다.
 
==== 한인애국단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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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 국민당]]에게서 받은 지원금을 사적인 목적으로 쓰다가 다른 독립운동가들의 눈밖에 나게 된다. 1930년대 '''[[윤봉길]]''' 의거 이전 어느 시기에 위혜림과 함께 한 중국 광동인의 술수에 말려들어 수천 달러를 사기당한 적이 있었다.<ref name="ja2">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8p</ref> 또한 독립운동 자금을 도박 자금으로도 탕진하는 등의 행위가 계속되자 이는 [[김구]]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1933년]]에는 [[박찬익]], [[엄항섭]]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친일 조선인인 상해한국인친우회위원단 [[유인발]]을 제거하였고, [[친일파]] 변절 의혹이 있는 [[옥관빈]]을 암살하였다.
 
[[1934년]] [[6월]]경부터 외교술로 대외교섭과 재정조달의 임무를 맡아온 '''[[박찬익 (1884년)|박찬익]]'''을 대신하여 [[중국]]측과의 교섭임무를 맡게 되었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3p</ref>
 
=== 김구와의 갈등과 만년 ===
==== 독자적 활동 ====
[[193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다가 그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1937년]] [[2월]] 안공근은 장남 [[안우생]]과 함께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하여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8월]] [[한인애국단]] 대표로서 미국내 한인독립운동단체와 연명으로 '''한국당호운단체(韓國黨護運團體)의 중일전국(中日戰局)에 대한 선언'''을 발표하고, 같은달 8월 17일 [[한국국민당 (1935년)|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과 함께 하와이와 미국내 한인독립운동 9개 단체를 토대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서 1938년까지 활동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97p</ref><ref name="한국일보" /> [[1937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이는 그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그의 신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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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씀씀이가 헤픈 것과 사치에 대한 비판도 있다. 당시 중국 관내에서 활동한 일반 독립군들의 생활수준은 일신을 지탱하기에도 넉넉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중국 정부의 지원금을 관장하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안공근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02페이지</ref>
 
== 학력 ==
* [[황해도]] [[신천군|신천]] 계몽보통학교 수료
* [[황해도]] [[신천군|신천]] 삼흥보통학교 수료
* [[황해도]] [[해주시|해주]] 신진보통학교 졸업
* [[평안남도]] [[진남포]]고등보통학교 수료
* [[경성사범학교]] 졸업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