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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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의 [[3·15 부정 선거]]를 한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고, 부정선거 진실 규명 운동에 동참하였다. [[4월]] 부정선거 원흉에 대한 학생 시위대를 독려하였다.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학생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끔찍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오른다. 국민들은 분노는 극에 달했다. 곧이어 고려대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한 학생들의 시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총장까지 나서봤지만 소용없었다. 이철승은 [[자유당]]의 무력 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학생들 앞에 나섰다. 반탁 운동 때부터 함께했던 후배들은 그의 설득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ref name="bantack03"/> 이후 정치 깡패들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한편 만일의 기습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을 보호하려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지광]]이 주축이 된 자유당 무력부대들은 귀가하던 학생들을 습격했다.<ref name="bantack03"/> 많은 사상자를 낸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국민이 들고 일어났다. 이후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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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장면]] 내각이 출범한다. 그는 [[장면]], [[박순천]], [[곽상훈]], [[정일형]] 등과 함께 [[민주당 (1955년)|민주당 신파]]의 일원이었으며, 민주당의 소장파 리더로서 그는 [[장면]]을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이후 장면 총리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해 [[9월]] [[장면]]이 [[장도영]]을 육군 참모 총장에 기용하려 하자, 이철승은 [[장도영]]을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양다리를 걸칠 수도 있음을 들어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장도영]]은 후에 [[박정희]] 등과 결탁하여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한다.
 
[[1960년]]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대한체육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61년]] [[3월]]말 제15차 UN총회의 [[한국]] 대표로 임명되어 출국,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였다. 그해 대한역도연맹 회장이 되었다.
 
===== 5.16 군사 정변 직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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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5·16 군사 정변}}
 
[[5·16 군사 정변]] 직후 [[박정희]]는 사람을 보내 야당인사들을 회유하려 했고 이때 이철승에게도 사람을 보내 회유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도와달라던 [[박정희]]의 회유를 거절하였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 정변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이어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원 정치학과에국제정치학과에 진학, [[1962년]]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최경록]], [[강문봉]], [[전규홍]], 이철승, [[양일동]] 및 전 주미 대사관 참사관 부인들은 1963년 3월 21일, 미국 대통령 관저 앞에서 "군대는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 "박정희 군사독재타도", "한국인은 군부정치를 원치 않는다", "한국인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희 장군의 군정연장제안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ref>{{뉴스 인용 |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32200329201019&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63-03-22&officeId=00032&pageNo=1&printNo=5354&publishType=00020|제목 = 백악관앞에서데모 |출판사=경향신문 | 작성일자 = 1963-3-22}} </ref> 이어 군사 정권에서 사람을 보내자 그는 군사정권의 무력 대응에 맞서 이들을 지켜내기도 했다. 그는 [[1964년]] 미국에서 귀국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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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다시 정계에 복귀, [[민주당 (1963년)|재건된 민주당]] 내에서 민주당 신파 계열의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5.16 군사 정변]]과 [[장면]]의 와병으로 거의 소멸, 와해상태에 있던 민주당 신파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다시 설득, 민주당 신파를 다시 재건하였으며 [[1967년]] 통합 야당으로 [[신민당 (1967년)|신민당]]이 창당되자 그는 [[신민당 (1967년)|신민당]]내 민주당 신파 계열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1965년]] [[2월 8일]] 다시 [[대한역도연맹]] 회장이 되었다. [[1965년]] [[박정희]], [[김종필]] 등의 한일회담에 반대, 이를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그해 [[4월 26일]] 대일굴욕외교를 비판하던 중 그의 집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6년]] 아시아 역도연맹 회장에 추대되었다. 그해 [[7월 5일]]에는 대한역도연맹 임시이사회를열고 선수강화위를 개편할 때 역도선수강화위원장이 되었다.
 
그 뒤 야당에서 8,9,10대 국회의원을 하면서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제9대 국회부의장, 신민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하는등 야당 중진의 반열에 올랐다. [[1965년]] [[2월]]에는 [[대한역도연맹]] 회장에 위촉되었다. [[1968년]]부터 [[박정희]]측의 삼선개헌안이 나오자 삼선개헌의 비민주성을 지적, 원내외에서 적극 반대하였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 야당 지도자의 한사람이던 그는 [[윤보선]], [[장면]], [[유진산]], [[유진오]], [[장준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과 함께 [[박정희]]의 정적이자 잠재적 대안자의 한 사람으로 주목되기도 했다.
 
===== 역도연맹내 갈등과 대권 도전 =====
[[1970년]] [[신민당 (1967년)|신민당]] 정무위원(政務委員)의 한사람으로 선발되고, 그해 [[6월]]에 대권도전 의사를 밝혔다. [[1971년]] 한국정책연구회(韓國政策硏究會)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그는 1949년부터 오랫동안 [[대한역도연맹]]의 일을 보았고 [[1955년]]부터는 [[대한역도연맹]]의 부회장에 연임됐으며 [[1961년]]부터는 역도연맹 회장이 되었다. 그런데 [[1966년]] [[9월]]에는 그해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동부베를린에서얼리는 세계역도연맹총회에 참가신청을 하였으나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외무부]]가 허락하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다.
1969
 
한국민권투쟁위원회 위원장
[[1967년]] [[1월 22일]] 대한역도연맹의 비상 회의로 갑자기 대한역도연맹 회장직에서 해임되었다.<ref name="leem">경향신문 1967.01.25, 8면 스포츠면</ref> 연맹 간부이던 이모는 그가 "정정법에 묶여있는 야당계 인사이기 때문에 활발한 움직임을 할수 없고 재정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재력이 풍부한 모당의 실력자로 바꿔야 한다.<ref name="leem"/>"며 그의 해임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1969년 한국민권투쟁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70년]] [[신민당 (1967년)|신민당]] 정무위원(政務委員)의 한사람으로 선발되고, 그해 [[6월]]에 대권도전 의사를 밝혔다. [[1971년]] 한국정책연구회(韓國政策硏究會)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그해 [[12월 2일]]에 다시 [[대한역도연맹]]의 이사로 복직하고 [[1973년]]에는 다시 [[대한역도연맹]] 부회장에 위촉되었다.
 
그러나 [[1973년]] [[9월]] 역도연맹 부회장직을 그만두게 된다.<ref>경향신문 1973.09.29, 8면 스포츠면</ref><ref>동아일보 1973.09.29, 8면 스포츠면</ref>
 
===== 유신 시절 =====
{{참고|40대 기수론|10월 유신|제4공화국}}
그뒤 [[1971년]]에 있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 [[김대중]] 등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세우고 대선후보자 경선에 참여하였다. 그러자 신민당내 원로들은 구상유취론, 젖비린내론을 내세워 젊은 소장파들의 활동을 방해하였다. [[장면]]의 사후 정치적 후견인이 없던 그에게는 여야 내부에서 견제와 불이익이 가해졌다. 김영삼과 이철승이 당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 나오자 [[김상현 (정치인)|김상현]] 등은 유진산이 지지하는 사람(김영삼을 가리킴)에게 당수직을 주었으니 대권은 줄 수 없다며 반발하였고 경선 초기에 잡음이 있었다. 71년 [[1월]] 당수인 [[유진산]]을 대신하여 다시 [[신민당 (1967년)|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결선 투표에서 [[김대중]]에게 패하였다. 당수 [[유진산]]으로부터 [[김영삼]]에게 양보하라는 권고를 받고 일단 대선후보자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1차 투표 결과는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로 김영삼은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 무효표는 이철승의 표였는데, 이철승이 [[유진산]]의 지명에 따른다는 약속을 파기한 것이다. 2차 투표에서 김영삼 410표에 [[김대중]] 485표가 나왔는데, 이는 이철승이 [[김대중]]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ref name="지명1">www.한국현대사.com(김진국 저 | 민연 | 2000.02.01) 184페이지</ref> 그는 [[김대중]]의 편을 들어주었지만 김대중은 나중에 그의 지역구까지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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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통합론과 미군철수 사태 중재 ====
{{참고|박동선 게이트|반미주의|주한미군|주한미군 철수}}
[[1972년]] 국제[[테니스]]클럽 회장이 되었다. [[1972년]] 이후에는 "중도통합론"을 제창하여 유신독재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는 [[윤보선]], [[장준하]], [[김영삼]], [[김대중]] 등과 대립하면서 박정희 정권과의 타협을 도모하였다. 1973년 [[신민당 (1967년)|신민당]] 부의장에 선출된 뒤 그해 야당몫의 제9대 [[대한민국의 국회|국회부의장]]에 피선되었고,피선되었다. [[1975년]]그는 제30차야당 인사의 신분이었으나 이후 [[국제연합미국]] UN총회, [[한국일본]]대표로 특별등을 선임,수시로 파견되었다가방문하며 귀국했다.한국에 이후대한 1976년고립정책을 [[신민당철회해줄 (1966년)|신민당]]것을 대표적극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설득하였다.
 
[[1975년]] [[3월]]초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내 고립주의자, 주한미군 철수론자들과 기타 미국 정치 인사들을 설득, [[3월 15일]]에는 [[일본]] [[도쿄]]에 들러 주일특파 기자들과 면담 뒤 일본 정치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고립정책을 철회해줄 것을 설득하고 [[3월 28일]]에 귀국했다. [[1975년]] [[5월 13일]]에는 [[국제문제공동연구소]]의 초청을 받고 일본 [[도쿄]]를 방문, 국제문제공동연구소 강연회에 참석한 뒤 5일만에 되돌아왔다. 그해 [[10월]]초 제30차 [[국제연합]] UN총회 [[한국]]대표단의 자문위원으로 특별 선임, 대표단과 함께 [[뉴욕 시]] 파견되었다가 [[10월 11일]] 귀국했다. 또한 국제사회의 시선을 인식한 [[박정희 정부]]는 특별히 UN총회대책 고문에 임명하기도 했다. 이후 1976년 [[신민당 (1966년)|신민당]] 대표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비주류의 대표로 주류인 [[김영삼]] 총재측에게 대립하였으나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76년 당수에 선임된 뒤 중도통합론을 내세웠다. 그는 월남패망을 지켜본 그는 남북대치상황에서 국가의 안보와 자유는 대립적 개념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조화의 개념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흑백논리나 선명론이 이나라 헌정사를 후퇴시켜 왔다는 주장을 하였다. 따라서 국내정치는 서로 경쟁하되, 정치적으로 협력할 것이 있다면 협력을 하고 외교 안보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민당]]내의 극한투쟁론자들은 그를 사쿠라로 몰면서 [[장면]]의 유약함과 [[유진산]]의 사쿠라와 엮어서 그를 비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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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자유민주총연맹 총재로 추대되었다. 이후 [[6월 항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 이듬해 1988년 4월 26일의 [[대한민국 13대 총선|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는 고향 전주에서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호남지역을 휩쓴 이른바 황색바람(김대중의 [[평화민주당]] 돌풍)에 휩쓸려 낙선하고 말았다. 이후 신한민주당은 와해되어 통일민주당에 흡수되고 만다. 그는 [[통일민주당]]에 입당하라는 권고를 물리치고 정계에서 은퇴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에 위촉되었고, [[1989년]]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다. [[1990년]] 다시 서울평화상 심사위원이 되었다.
 
=== 생애 후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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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한 이후로 정계 일선을 은퇴하고 각종 우익운동과 반북반공운동에 앞장서면서 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이사,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등에 선출되었다. 이후 제3대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민족정론소식 회장을 맡고 있다. 그뒤 우파 단체의 원로로 우익 청년들을 지도하였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반대하는 우파 단체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여러 우익 단체 활동을 지원하고 강연 활동 등을 하였다.
 
1995년 한국노년유권자연맹 고문, [[1996년]]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1997년]] [[11월 21일]] [[서울특별시]] [[서울역]]광장에서 민족진영애국단체연합 등 범 우파단체를 소집, 민족진영구국안보총궐기대회를 주관하였다. [[1998년]] 대한민국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회장에 선임되고, [[1999년]] 운석 장면박사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이 되어 장면 기념사업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2002년]] 2002 월드컵조직위원회 조직위원에 재위촉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이 되었다. [[2008년]]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고, [[2010년]] [[1월]]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에 연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