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위군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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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국민방위군_징집자들.jpg|썸네일|300px|right|소집된 국민방위군]]
[[파일:이승만 신성모 윤보선.jpg‎|썸네일|200px|[[이승만]], [[신성모]], [[윤보선]](1949년 3.1절 기념식장에서)<br>(사건 직후 윤보선은 이승만에게 신성모와 김윤근 등의 처벌을 건의했으나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의 농간이라는 대답을 듣고 이승만과 결별한다.)]]
 
'''국민방위군 사건'''(國民防衛軍 事件)은 [[한국전쟁]]중 [[1951년]] [[1월]] [[1·4 후퇴]]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월~2월사이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이들 가운데 아사자, 동사자가 약 9만에서 12만여 명에 이르렀던 사건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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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행렬과 고위간부들 예산 유용 ===
[[파일:Shin sung.jpg|thumb|right|160px|당시 국방부장관 [[신성모]]<br>(사령관으로 김윤근을 임명했으며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문제는 서울에 집결한 50만 명을 어떻게 후송하느냐였는데, 이들 50만 명은 걸어서 추운 혹한 상황속에 천릿길을 돌파해야 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숙식도 제공되지 않았으며 보급과 겨울피복 및 군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의 고급 지휘관,장교들이 장병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보급품을 횡령,착복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혹한의 추윗속에 식량과 겨울 피복 조차 지급 받지 못하고 굶주린 채 '장거리를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은 수많은 50여만 명의 병사들은 이동 중 아사하거나 동사하게된다. 불과 100여 일 사이에 50만의 방위군 장병 중 무려 약 5만 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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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51년 사건]]
[[분류:대한민국의 정치]]
[[분류:한국 전쟁]]
[[분류:제1공화국]]
[[분류:대한민국의 군사 사건 및 사고]]
[[분류:이승만]]
[[분류:조병옥]]
[[분류:윤보선]]
[[분류:부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