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두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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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 이후 ===
정부의 비호를 받지 못하던 그는 여러 차례 가명을 사용하면서 도피하였다. 그 뒤 강원도 양구군에서 잠깐 군납 공장을 경영하다가 [[1960년]] [[4·19 혁명]] 이후 김구 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잠적하였다. 그러나 [[1960년]]과 [[1961년]] 여러 차례 길거리에서 테러를 당하였다. [[1961년]] [[4월 18일]] 진상 규명 위원회 간사 김용희에게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 소멸로 풀려나고, [[1965년]]에는 백범 독서회장 곽태영으로부터 칼로 목을 찔리기도 했으나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후 본부인과 이혼하였고, 생계에도 곤란을 겪던 그는 약 20년 동안 안영준이라는 가명으로 필사적인 은신 생활을 했으나, [[1987년]] [[3월 28일]] 그를 알아본 민족 정기 구현회장 권중희에게[[권중희]]에게 서울 마포구청 앞에서 발각되어 몽둥이를몽둥이로 맞으면서구타당하면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그는 이미 도피를 포기한 상태였으나 정부에서는 그의 신변을 보호하지도 않았다. [[1992년]] [[4월 13일]]자 [[동아일보]] 지면을 통하여 백범 암살의 배후가 전 육군 소장 [[김창룡]]이었다고 증언하여 큰 화제가 되었으나, 증언의 세부 내용이 번복되거나 내용의 진위가 의심되는 부분들이 있어 논란이 되었다.<ref>{{웹 인용|제목=안두희와 관련자들의 증언|출판사=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url=http://www.kimkoo.or.kr/01kimkoo/sub.asp?pagecode=m01s04t09a}}</ref>
 
=== 사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