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 (소설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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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경'''([[1960년]] [[2월 4일]]~)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경상남도]] [[마산시]](현 [[창원시]]) 출신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87년]] 희곡 〈폭설〉로 데뷔하였으며, [[2002년]] [[오늘의 작가상]], [[2006년]]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ref>[http://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sm=tab_txc&ie=utf8&query=%EC%86%8C%EC%84%A4%EA%B0%80%EC%A0%95%EB%AF%B8%EA%B2%BD&os=173002 네이버 검색 - 소설가정미경]</ref>.
1. 작품 개괄
 
== 출처 ==
정미경의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 양식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면서도 21세기적 문제의식을 갖는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서 21세기적 문제의식이란 바로 사용가치나 교환가치가 아닌 기호가치가 지배하는 소비자본주의의 생태를 현미경으로 비춘 듯한 마이크로한 묘사에서 발견된다. 예컨대 작가의 첫 장편소설인 󰡔장밋빛 인생󰡕에서 “사람들이 입는 건 청바지가 아니라 리바이스의 자유로움이며 들이마시는 건 담배가 아니라 말보로의 거친 마초 이미지”라고 말할 때 이 작가가 문제삼는 것은 가짜의 허구성이 아니라 가짜의 유혹성이다. 즉 정미경의 소설은 자본주의사회의 어떤 기호나 이미지가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비판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그런 줄 알면서도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욕망이 어떻게 촉발되고 펼쳐지다가 꺾이는지에 관한 욕망의 드라마를 보여주는데 있다.</br></br>
<references/>
이런 문제의식은 두 번째 장편소설인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에서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주인공 이중호는 “돈이란 종이로 만들어진 푸른 혈액이며 내 안의 신이며 혈관 속을 흐르는 붉고 끈적이는 피보다도 더 강하게 나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파생 금융상품 트레이더인 이중호가 “목적지까지는 브레이크를 쓰지 않고 가속 페달만으로 운전”하기를 즐기는 속도광이라는 점은 자본주의적 욕망이 파시스트적 가속도로 질주하는 우리 시대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바로 이러한 무한 질주로 건설되는 돈의 제국을 작가는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로 명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세계는 생산이 아닌 소비, 결핍이 아닌 잉여, 고통이 아닌 쾌락과 싸워야 하는 21세기적 자본주의의 현실을 극명하게 대변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br></br>
이렇듯 정미경은 자신의 소설에서 전세계적으로도 대표적인 소비도시인 서울, 그 중에서도 가장 럭셔리한 강남에서 펼쳐지는 소비자본주의적 욕망의 향연을 펼쳐보이고 있다. 정미경 소설의 중심배경인 ‘강남’이야말로 바로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인 것이다. 정미경의 대표작 중 하나인 「내 아들의 연인」은 바로 이러한 강남에서 펼쳐지는, 남한과 북한의 이데올로기 대립보다 더 격렬하고 흥미로운 계급적, 경제적 격차의 현실을 디테일하면서도 박진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가난한 강북 출신 여자친구를 둔 아들을 바라보는 강남 엄마의 불안한 내면과 그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도 못하는 위선에 대한 자각을 통해 “이제 저지르는 죄마저 이렇게 하찮고 비겁하고 졸렬하다.”고 자조하는 21세기 부르주아들의 윤리감각과 그것의 허구성을 섬세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소설에서는 흔하지 않던 부르주아 계층의 생활상과 내면의식을 탐구해 온 정미경의 소설은 정이현, 서하진 소설과 함께 ‘강남소설’이라는 하위장르로 묶이면서 21세기 새로운 한국문학의 지류를 만들어가고 있다. </br></br>
그 중에서도 정미경은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아 일정한 성공을 거둔 상류계층의 다양한 생태를 다각도로 조망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한국소설에서 잘 다뤄지지 않았던 부르주아를 새롭고도 흥미로운 소설적 인물로 만들어냈다. 오랫동안 한국문학에서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존재의 화신으로 그려졌던 부자는 비로소 정미경 소설에서 일상의 디테일과 내면의 깊이를 갖추면서 한국문학에 낯설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정미경 소설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부르주아들의 중독 현상이다. 작가는 「밤이여, 나뉘어라」나 「파견근무」 등의 단편소설에서 도박이나 알코올에 중독된 부르주아를 그리고 있는데, 그들 모두는 삶에 대해 어떠한 가치평가도 하지 않은 채 방관자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한 태도는 언뜻 가치중립적이고 관용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아무런 가치판단의 기준도 없이 주어진 시스템 속에서 쉽게 적응하며 사는 사람들의 심드렁한 모습에 다름 아니다. 중독은 바로 그런 얼빠지고 심드렁한 부르주아들을 유혹하고 자극하는 일종의 죽음충동으로, 그들은 그 순간에만 생에 대한 자각을 할 수 있게 된다. 정미경 소설에서 그려지는 부르주아의 중독 현상을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88만원 세대들이 무위(無爲)로써 현실에 저항하는 것처럼, 정미경 소설의 부르주아들은 자발적으로 중독에 빠짐으로써 무감각하고 무감동한 현실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미경은 강남, 부르주아, 중독이라는, 지금까지의 한국문학에서는 낯선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21세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br>
2. 작가 소개
정미경은 1960년 마산에서 태어났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으로 당선되어 등단했지만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다. 긴 공백기를 거쳐 2001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단편소설 「비소여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데뷔한 뒤 2002년 첫 장편소설인 󰡔장밋빛 인생󰡕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 창작 활동을 시작한다. 긴 공백기를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정미경은 󰡔장밋빛 인생󰡕을 비롯해서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2005), 󰡔아프리카의 별󰡕(2010) 총 세 편의 장편소설과 󰡔나의 피투성이 연인󰡕(2004),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2006), 󰡔내 아들의 연인󰡕(2008)과 같은 세 권의 단편집을 발표했다. 그리고 2006년 「밤이여, 나뉘어라」라는 단편소설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br></br>
</br>위의 작품 목록과 수상경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정미경은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 쉬지 않고 성실하게 작품활동을 하면서 짧은 기간 안에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모두에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다. 탄탄한 플롯과 섬세한 문체, 구체적 실감을 주는 디테일까지, 정미경은 소설의 정석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소설이라는 장르문법의 기초를 빈틈없이 보여주는 작가다. 그러면서도 2000년대 한국소설의 일정한 경향성-자폐적인 내면의식, 비현실적인 상상력 등-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현실에 대한 작가 특유의 문제의식을 스케일 큰 서사에 담아내고 있다. 2000년대 등단한 늦깎이 신인이면서도 정통소설의 묵직함과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동시에 갖춘 작가 정미경의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br>
 
{{토막글|작가}}
3. 작품 소개
 
[[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
●「밤이여, 나뉘어라」</br>
[[분류:1960년 태어남]]
정미경에게 한국의 대표적인 문학상 중 하나인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밤이여, 나뉘어라」는, 전락한 천재적 우상의 초상이라는 고전적인 문학적 테마를 과거와 현재, 낮과 밤, 나와 너 등의 이분법적 순환구조 속에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성공한 영화감독인 ‘나’가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이라고 부를 만큼 자신의 우상이자 욕망의 대상이었던 P를 십년 만에 다시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겪게 되는 일련의 내적, 외적 변화를 다루고 있다. 아무런 노력이나 고뇌 없이도 타고난 재능으로 손쉽게 사회적 성공을 거두는 천재 P와 그러한 그러한 천재와 경쟁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나’라는 소설 속 갈등구조는 과거와는 정반대로 알코올 중독자와 성공한 영화감독이라는 뒤바뀐 위치에 의해 반전을 겪는다.</br>
[[분류:마산시 출신]]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반전에도 불구하고 P에 대한 ‘나’의 열등감과 모방욕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나’는 영화감독으로서 거둔 세속적 성공과 진지한 평가마저 한갓 농담으로 만들어버리는 P의 자발적 몰락과 그것이 연출하는 장엄한 풍경에 동참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럴 때 P의 알코올 중독은 단순히 몰락한 천재의 초라한 현실이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세속적 욕망을 넘어서 신의 욕망에 다가서려는 천재적 광기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자발적 몰락에 참여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는 그 순간 ‘나’는 힘겹게 이룬 소박한 성공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써 P의 존재를 부인한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나’가 밤에 호텔 바로 찾아온 P를 모른다고 부정한 부분은 그런 ‘나’의 두려운 감정을 암시한다. 또한 “나도 투명한 밤이 두렵다. 하얀 밤이여, 나뉘어라”는 마지막 진술이 의미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P의 ‘하얀 밤’이 상징하는 무욕의 삶이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P가 만들고자 했던 “영혼의 면역제, 러브피아”의 불가능성과 닮아 있다.</br>
[[분류:이화여자대학교 동문]]
「밤이여, 나뉘어라」는 이처럼 욕망의 그늘을 갖지 못한 천재 P의 비극적 몰락과 욕망의 대상이었던 천재의 몰락으로 인해 자아 해체와 내적 붕괴의 위험에 처한 ‘나’의 허구적 도피를 통해 누가 진짜 병들었는지를 다시 질문하고 있다. 그 질문이 흥미로운 이유는 자본주의 적 욕망과 쾌락의 병리학을 대표하는 중독이라는 질환에서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면역가능성을 찾아내는 작가의 반어적 현실인식 때문이다.</br>
[[분류:1987년 데뷔]]
●「내 아들의 연인」</br>
이 소설은 한국문학의 계급적 지형도를 다시 그리게 한 부르주아에 의한, 부르주아를 위한, 부르주아의 소설이다. 「내 아들의 연인」은 아들 현이와 그의 연인 도란 사이의 해소 불가능한 계급적, 문화적 차이를 목도하는 부유한 중년여성 ‘나’의 자기 고백록이다. ‘나’의 첫 번째 고백은 오늘날 가난한 여자와 부유한 남자의 사랑이 불가능한 진짜 이유는 그들 사이의 경제적 차이가 아니라, 그러한 부의 차이가 결정한 취향과 분위기, 사고방식, 생활태도 등의 차이 때문이라는 점이다. 분명 ‘나’의 아들과 남편은 도란이의 가난을 문제삼지 않을 정도의 세련된 예의와 관대한 선의를 갖춘 교양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 계층적 격차는 선의나 호감 같은 것으로는 결코 봉합할 수 없는 “뼛속 깊은 데서 나오는 다름”이다. 따라서 이 메울 수 없는 다름에 대한 ‘나’의 고백은 빈부의 격차가 라이프스타일의 차이를 넘어 이제는 일종의 지울 수 없는 낙인과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는 사실의 확인에 다름 아니다.
‘나’의 두 번째 고백은 아들의 연인에 대한 ‘나’의 은밀한 죄의식과 우울증이다. ‘나’는 부르주아 계층 사람들의 공통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정한 이기심과 속물성, 무관심을 갖춘 남편과는 달리, 자의식적 균형감각으로 ‘나’가 속한 계층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유지한다. 예컨대 ‘나’는 도란과 아들이 헤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도란이에 대한 안쓰러움과 우울한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해 “비겹하고 졸렬하다”고 비난할 만큼의 내면적 진실을 갖춘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나’의 비판은 딱 그만큼에서 그친다. ‘나’의 내면에서 스스로를 대책 없는 속물적 존재로 떨어지는 것을 세련된 방식으로 방지해주는 바로 그만큼의 윤리의식은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나아가 소설 속 부르주아의 윤리적 감각에 대한 흥미로운 문제의식과 그 한계에 대한 비판의식은 화자 자신에게만 실감되는 죄의식을 발생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죄의식 때문에 비로소 ‘나’는 자기 계층의 한계를 응시하고 자기 내면에 그늘을 갖게 된다.
정미경 소설에 등장하는 부르주아가 계층적 전형성에 머무르지 않고 개성적인 소설적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죄의식과 내적 응시 때문이다. 「내 아들의 연인」은 바로 이러한 내면의 딜레마와 아이러니에 관한 고백이다. 그리고 죄의식이야말로 그러한 고백을 진정성 있는 것으로 구성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에 해당한다. 소설 전체를 감싸는 우울한 정조야말로 바로 이러한 죄의식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의 윤리적 감각을 특징짓는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정미경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는 자본주의적 질주 욕망과 소비 욕망을 극한으로 밀고가다 급기여 그 욕망으로 인해 파괴되고 마는 두 인물, 이중호와 오윤희에 관한 소설이다. 소설은 주인공 이중호의 질주로부터 시작한다. 숫자광이자 일중독자이며 질주광이기도 한 그는 금요일 밤마다 “브레이크를 쓰지 않고 가속페달만으로 운전”하는 혼자만의 룰에 따라 엑스터시와도 같은 경주를 한다. 이때 브레이크가 장착되지 않은 자동차란 바로 질주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은유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차의 운전자에게 정지란 곧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결국 파생 금융상품 트레이더인 이중호는 최한석과의 밀거래가 폭로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이스탄불로 도피하지만 결국 한석이 보낸 킬러의 총에 맞아 죽는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비현실적인 무한 질주의 끝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바로 자기 파괴이자 죽음인 것이다. </br></br>
소설 속 또 다른 주인공인 오윤희는 신분상승 욕구에 불타는 고급 콜걸로 과거에 공장에서 일했던 자신의 전력을 지우기 위해 명품에 매달리는 인물이다. ‘튀고이즘’이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오윤희는 남들과 다른 취향, 남들과 다른 패션, 남들과 다른 ‘튀는’ 삶을 추구하지만, 그녀의 이런 구별짓기 욕망은 결국 자신보다 높은 계층에 대한 모방욕망에 다름 아니다.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의 모작(母作)이자 전사(前史)라고 할 수 있는 「호텔 유로, 1203」의 주인공 정미경 또한 오윤희와 다르지 않다. 방송작가인 ‘나’가 입지도 못할 명품 드레스를 비싼 값에 산 이유는 바로 아나운서 윤미예에 대한 모방욕망 때문이다. 오윤희 또한 마찬가지다. 오윤희가 몸을 팔아서라도 충족시키고자 했던 것은 돈이나 명성 그 자체라기보다는 이미 돈과 명성을 갖춘 존재들에 대한 욕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윤희는 「호텔 유로, 1203」의 ‘나’가 좀더 극단적으로 극화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오윤희는 영화배우로 성공함으로써 그토록 바라던 돈과 명성을 갖게 되지만 그 끝에서 그녀가 느끼는 것은 ‘두려움과 슬픔’이다. 무한 욕망의 시대를 표류하면서 통과한 존재가 느끼는 이 ‘이상한 슬픔’이야말로, 자본의 폭력적 질주를 비판적 성찰 없이 극단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비로소 성취할 수 있는 자의식적 반성인 것이다. </br></br>
정미경은 모든 삶이 가짜일 때는 그 가짜를 견디는 인생이 진짜임을 보여주듯이, 자본주의의 끝장을 통해 그러한 자본주의적 현실에 대한 반성적 항체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알려주려 한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욕망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욕망을 끝까지 철저하게 경험함으로써 오히려 그 욕망을 거부하는 반동의 윤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반어적 욕망론이야말로, 작가가 이 소설에서 획득한 반자본주의적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br>
4. 작가의 말 비평가의 목소리
 
몸을 갖지 못한 언어가 지은 집은 어쩌면 가장 무력한 것이 아닌가 절망스러울 때도 있지만, 이전에 존재했던 것들, 동시대를 같이 숨쉬는 것들, 우리가 사라진 후에도 존재할 것들은 역설적으로 오직 언어 안에서만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선언이 신의 영원성에 대한 선언이듯, 언어 외엔 도구가 없는 문학만이 영원과 겨룰 수 있지 않을까. 문학의 위기와 고사를 말하는 세태 속에서도 문학이 주는 매혹은 영원하리라고 믿으며, 자다 깨인 밤의 노래를 기록하고 싶다. (정미경)</br></br>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끝내 이루지 못할 것을 처음부터 꿈꾸었다는 것만이 언제까지나 나를 붙들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글을 쓰는 동안만은 언어와 빛이 동일해진다. 언어로도 삶에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는 것,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붙들 수 있다는 것, 그 가능성이 미치도록 나를 매혹한다. (정미경)</br></br>
 
무한욕망 시대의 이상한 슬픔에 눈 주는 정미경의 포스트리얼리즘적 소설들이 정통 리얼리즘 소설과 다른 점은 현실적인 비판 자체나 비판을 통한 대안의 모색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정미경은 억압적인 체제의 단단함에 눈 주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단단함 앞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개인들의 삶이나 욕망에 눈 준다. (김미현)</br></br>
 
정미경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자신만의 세계를 확연하게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서사 구조의 고전적 안정감, 미묘한 정서를 옮겨 담는 섬세한 문체, 존재와 삶을 응시하는 강렬한 시선, 이 세 가닥의 튼실한 끈이 수놓은 풍경은 요즘의 우리 문단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새로운 에너지를 내뿜고 있다. (박철화)</br></br>
 
정미경의 소설에는 진실과 거짓이 섞여들고 진짜와 가짜가 뒤바뀌고 외양이 본질을 결정하는 전도와 기만에 찬 스펙타클 사회의 일상이 전경화되어 있다. 작가는 이 스펙타클 사회의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적인 이면을 들여다본다. (김경연)</br></b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