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초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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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초재는 [[몽골군]]이 금(金)의 [[카이펑|변경]]을 함락시켰을 때 그의 지식을 귀하게 여긴 칭기즈칸에 의해 [[참모]]가 되었다. 그는 항복하지 않은 성민(城民)을 모두 [[학살]]하는 옛 제도를 폐지하자고 건의했다. 또 [[문화]]·[[교육]]의 진흥과 [[유학]]의 채택을 주장했다. 관직은 중서령(中書令)에 이르렀으며, 원대의 개국 규모는 그에 의해 많이 결정되었다.
 
저서로 《[[담연거사집잠연거사집]]》(湛然居士集)을 남겼다. 또한 칭기즈 칸을 따라 서역 정벌에 나섰다가 후에 [[서역]]에서 약 6년을 머무르면서 각지의 길·마을·산천·산물과 도중에서 얻은 견문들을 기록하여 《[[서유록]]》(西遊錄) 1권을 지었다.
 
이름 유래 ; 좌전 虽楚有材,晋实用之에서 楚材라고 호칭했다
== 참고 자료 ==
* {{글로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