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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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제목=
|출생일= [[1896년]]
|출생지= [[조선]] [[함경북도]] [[온성군|온성]] 남양면
|사망지=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평양]]
|사망일= [[1957년]]
|사망원인= 사형(옥사)
|거주지=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특별시]]에 거주하였다.
|국적= {{국기나라|대한제국}}, {{국기나라|중화인민공화국}}, {{국기나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본명=
|학력=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직업= 군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운동가, 정치인
|별명=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종교= 무교
|배우자= [[허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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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해방]] 이후 [[북조선]]으로 귀환하였으며, 1946년 1월 조선독립동맹을 개칭해 '조선신민당'을 창설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연안파의 중진으로 활동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그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나 56년 8월 [[김일성]]의 독재화를 비판하다가 8월 종파 사건에 연루되어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독립운동 시 가명은 최창석(崔昌錫), 최창순(崔昌淳), 최동우(崔東宇), 이건우(李建宇), 최태현 등을 사용하였다. [[변호사]] [[허헌]]의 딸 [[허정숙]]의 남편이다. [[함경북도]] 출신.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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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2월]] [[경성부]]에서 [[조선인]] 통합 [[공산당]] 조직을 결성했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검거된 [[통일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6년 동안 투옥되었다. [[1934년]] 석방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그의 주변을 감시하였다.
 
===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활동 ===
=== 망명과 무장 독립운동 ===
==== 망명과 민족혁명당 활동 ====
{{참고|조선민족전위동맹|조선의용대|조선민족혁명당}}
 
1935년 배편으로 [[상하이]]에 도착, 중국에 건너가 난징(南京)에서 [[김원봉]](金元鳳)을 만난다. 그뒤 [[난징]]과 우한(武漢), 옌안(延安) 등지의 [[공산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의 비밀조직에서 활동했다.
 
[[1935년]] [[10월]]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난징]]에서 [[조선민족혁명당]] 창당 조직에 참여한다. 그러나 그는 [[민족혁명당]]이 자본주의 정당으로 변질되어간다며 불평이었고, [[지청천]], [[조소앙]]일파는 물론이고 [[김규식]]과도 수시로 마찰을 빚게 되었다.
1936년 한커우(漢口)에서 [[조선민족전위동맹|전위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해부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였고, 동시에 [[조선민족혁명당]]에 동참하여 함께 활동하였으다. 그러나 [[김규식 (1881년)|김규식]] 등과 불화하였으며 [[1938년]] [[5월]]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재무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으나,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대일선전전에 주력하는 [[김원봉]]의 노선에 반발, 부르주아와 결탁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원봉]]과 의사충돌 뒤 결별하고 [[화북]]으로 갔다.
 
[[조소앙]], [[지청천]] 등의 일부 세력은 일찍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김구]] 세력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게 되었다.<ref name="tongilun275">강만길,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서해문집, 2008) 275페이지</ref> 그러나 최창익은 이들의 탈퇴에서 만족하지 않고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정당으로 거듭나야 된다, 노동자와 피착취 하층민의 권익 옹호 정당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 김원봉과의 대립 ====
그러나 조소앙, 지청천 일파가 떠난 뒤에도 그는 [[김원봉]]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그 후에도 [[민족혁명당]]을 계급정당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최창익 세력과 '[[중국]] 안에서는 우리 민족의 계급적 토대가 없어서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있을 수 없으므로 [[민족혁명당]]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민족해방과 함께 민주 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김원봉]] 세력 사이에 대립이 노정되었다.<ref name="tongilun275"/> 그는 [[김원봉]]이 다소 이념이 선명하지 못하다고 보고 불만을 품게 된다.
 
또한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수립하는 문제에서도 [[황포군관학교]]를<ref name="tongilun275"/> 졸업하고 [[중국 국민당]]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김원봉]]은 국부군(중국 국민당군)과의 연합전선을 바랬는데 반해, [[민족혁명당]]을 계급 정당으로 만들려 했던 최창익은 [[중국 공산군]]과의 연합을 바랬다.<ref name="tongilun276">강만길,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서해문집, 2008) 276페이지</ref> 이에 최창익 등은 [[김원봉]] 중심의 [[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하여 [[조선청년전시복무단]] 등을 만들었다가 결국 [[중국공산군]]의 지역인 [[연안]]으로 가서 [[화북조선독립동맹]]에 참가한 것이다.<ref name="tongilun276"/>
 
[[1940년]]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였던 [[김두봉]]이 자신의 첩이 다른 아나키스트 [[김진익]]과 불륜, 임신한 사실과, [[상하이 임시정부]]내 보수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임정 참여를 거부하고 [[연안]]으로 떠나자 최창익은 우리도 떠날 때라며 전시복무단원은 물론 [[조선의용대]]내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함께 화북으로 가자고 연락하였고, 각 소대 내 사회주의자들이 이탈하여 그를 따랐다.
 
==== 무장 독립 운동 ====
1936년 한커우(漢口)에서 [[조선민족전위동맹|전위동맹]]을 결성하였다. 전위동맹에서 활동할 무렵 그는 이건우(李建宇)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이 해부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에 가담하였고, 동시에 [[조선민족혁명당]]에 동참하여 함께 활동하였으다. 그러나 [[김규식 (1881년)|김규식]] 등과 불화하였으며 [[1938년]] [[5월]] [[김원봉]]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재무한조선청년전시복무단]]의 지휘를 맡기도 하였으나, 중국 국민당 정부와 관계를 가지고 대일선전전에 주력하는 [[김원봉]]의 노선에 반발, 부르주아와 결탁한다는 이유를 들어 [[김원봉]]과 의사충돌 뒤 결별하고 [[화북]]으로 갔다.
 
망명생활 중 그는 최창석, 최창순, 최동우, 이건우, 최태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였다.
 
[[1938년]] [[10얼]] [[중국]]의 [[무한]](武漢)이 일본군에 함락된 뒤 [[전시복무단]]의 일부를 이끌고 연안으로 가서 '청년연합회' 조직에 참가한다.<ref name="tongilun267">강만길,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서해문집, 2008) 267페이지</ref>
망명생활 중 그는 최창석, 최창순, 최동우, 최태현 등 다양한 가명을 사용하였다.
 
=== 조선의용군,혁명 조선독립동맹활동과 활동조선독립동맹 ===
==== 중국 공산당에 참여 ====
[[파일:Joseonuiyonggun1945.PNG|thumb|230px|right|[[조선의용군]]]]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ref>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 </ref>하다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화북의 연안(延安)으로 이동, [[무정 (사람)|무정충칭]](武亭), [[김두봉]](金枓奉)떠났다. 등과 연합하여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화북지역에 주둔중이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두게 하였다.
 
최창익은 전시복무단 일부 및 [[조선의용대]]원 중 [[공산주의]]자 일부를 이끌고 화북의 연안(延安)으로 이동, [[무정 (사람)|무정]](武亭), [[김두봉]](金枓奉) 등과 연합하여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화북지역에 주둔중이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두게 하였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합하는데 반대하여 [[화북]]으로 올라온 [[조선의용대]]원들을 합류시켜 [[무정 (사람)|무정]] 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개칭하고 [[조선독립동맹]]의 군사단체로 활용하였다.
 
==== 조선독립동맹 참여 ====
{{참고|조선독립동맹}}
[[1941년]] [[1월]]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화북]] 진동(晋東)에서 [[무정 (사람)|무정]], 이건우(李建宇) 등과 함께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고 단원을 모집하였다. [[1942년]] [[김두봉]], [[무정 (사람)|무정]], [[한빈]] 등과 더불어 [[조선독립동맹]] 창당에 참여, [[무정 (사람)|무정]]의 양보로 무난하게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김원봉]]의 노선에 반대<ref>이종석 《조선로동당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7)》 (역사비평사, 2006) 234페이지 </ref>하다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국 화북의 연안(延安)으로 이동, [[무정 (사람)|무정]](武亭), [[김두봉]](金枓奉) 등과 연합하여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 화북지역에 주둔중이던 [[조선의용대]]의 일부를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두게 하였다.
 
성립 당초의 연합회는 회장에 무정, 조직부장에 이유민, 선전부장에 장진광, 경제부장에 한득지, 위원에 이건우 등으로 되어 있다.<ref name="tongilun267"/> 이유민과 장진광 등은 항일군정대학 소속이어서 '청년연합회'는 당초 [[중국공산당]]과 행동을 같이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만으로 청년연합회가 구성된 것은 아니었고 최창익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혁명당]]세력의 일부도 참가했다.<ref name="tongilun267"/>
 
당시 [[일본]] 측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1939년에) 앞서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이건우, 즉 최창익이 [[연안]]에 가서 [[중국 공산군]]의 대장정에 참가한 후<ref name="tongilun266">강만길,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서해문집, 2008) 266페이지</ref> [[팔로군]] 총사령부 작전과장과 포병단장을 역임한 [[무정 (사람)|무정]]을 비롯한 연안에 있던 [[조선인]] 20여 명과 함께 [[재화북조선인반전단체]]의 기본 조직으로서 [[1939년]] [[연맹조직위원회]]를 만들었다가 다시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의 [[왕지연]](王志延) 등과 교섭하여 [[조선의용대]]의 중국공산군 지역에의 흡수를 위해 조직한 것이 [[화북조선청년연합회]]<ref name="tongilun266"/>라 한다.
 
[[1942년]] [[8월]] [[김두봉]], [[무정 (사람)|무정]], [[한빈]] 등과 더불어 [[조선독립동맹]] 창당에 참여했다.
 
성립 당초의 주도층은 주석에는 [[김두봉]], 중앙집행위원에 [[무정 (사람)|무정]], 최창익, 한빈, 김창만, 김학무, [[박효삼]], [[이유민]], [[이춘암]], [[진한중]], [[채국번]] 등이었다.<ref name="tongilun276"/> 성립 당초에는 약 300명 정도로 출발했으나 그 수가 점점 증가하여 8.15 당시에는 약 2000명으로 증가.<ref name="tongilun276"/>하였다. [[무정 (사람)|무정]]의 양보로 무난하게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화북]]으로 올라온 [[조선의용대]]원들을 합류시켜 [[무정 (사람)|무정]] 등과 함께 [[조선의용군]]으로 이름을 개칭하고 [[조선독립동맹]]의 군사단체로 활용하였다.
 
이어 자신이 이끌고 온 전시복무단 및 [[조선의용대]] 탈퇴자들을 [[무정 (사람)|무정]]이 이끌던 군사와 합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고, 주요 지휘관의 한사람이 되었다.
[[1941년]] [[1월]]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받고 [[화북]] 진동(晋東)에서 [[무정 (사람)|무정]], 이건우(李建宇) 등과 함께 [[화북조선청년연합회]]를 조직하고 단원을 모집하였다. [[1942년]] [[김두봉]], [[무정 (사람)|무정]], [[한빈]] 등과 더불어 [[조선독립동맹]] 창당에 참여, [[무정 (사람)|무정]]의 양보로 무난하게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 해방 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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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 [[북조선노동당]] 상임위원, [[북조선인민위원회]] 검열국장을 거쳐 [[1948년]] [[4월]]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 북조선 정부 수립참여와 이후숙청 ===
==== 최고인민회의, 북조선 정부 수립 참여 ====
{{참고|최고인민회의|한국 전쟁|연안파}}
1948년 [[북조선노동당]]중앙위원 및 제1기 [[최고인민회의|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재정상을 맡았다. [[한국전쟁]] 후 [[1952년]] 북조선의 내각 부수상에 취임하였다. [[1954년]] 다시 내각 재정상이 되고 [[1955년]] 국가검열성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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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박창옥]]·[[윤공흠]] 등과 함께 반당·반국가 종파분자로 비판받고 좌천되었다가 56년 [[8월 30일]]의 [[조선노동당]] 중앙위 8월 전원회의에서 [[소련파]] [[박창옥]] 등과 함께 [[김일성]]의 일인독재화를 지적하며 [[김일성]]을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8월 종파사건]]'으로 비화되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 당시 동료 공산주의자였던 [[안영호]]의 애인을 빼앗아 도피한 후 그녀를 버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혹<ref name="sangheo">상허학회, 총서 불멸의 역사와 북한문학 (깊은샘, 2008) 59페이지</ref>이 제기되었다.
=== 8월 종파사건과 숙청 ===
 
==== 김일성 비판 운동 ====
[[1958년]]초 소련파가 [[김일성]]의 1인 독재를 비판하면서 최창익은 소련파에 동조한다. [[소련파]]의 [[박창옥]]은 [[소련공산당]]의 개인숭배비판 노선을 배경으로 [[김일성]]을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연안파인 최창익과 연합전선을 폈다.<ref name="gang141">강태욱, 인간중심철학과 한국의 민주주의 (시대정신, 2009) 141페이지</ref> 그는 집단지도체제를 원했지만 [[김일성]]의 빨치산 계열은 다수결로 하자, 민주적인 방법으로 하자는 말만 되풀이하고 묵살하였다. 그는 [[소련파]]의 움직임을 보아 [[소련]]과 [[중국]]이 협조하리라 확신하고 김일성 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 중앙검열위원회의 감시에 포착되었고, [[소련]]을 방문 중이던 [[김일성]]은 [[1956년]] [[8월]] 당 전원회의 개최 전에 부랴부랴 귀국하게 된다.<ref name="gang141"/> 당 전원회의에서 [[소련파]]의 [[박창옥]]과 연안파의 최창익은 [[김일성]]의 독재화를 정면 비판하면서 [[소련 공산당]]의 20차 당 대회에서 결정한 바처럼 개인독재를 버리고 모든 당 기관을 집체적 지도체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f name="gang141"/> 또 이러한 집체적 지도체제를 내각, 군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에도 적용<ref name="gang141"/>해야 한다며 [[김일성]]을 강하게 밀어붙였다.<ref name="gang142">강태욱, 인간중심철학과 한국의 민주주의 (시대정신, 2009) 142페이지</ref>
 
또한 최창익은 아울러 [[김일성]]의 [[빨치산]] 투쟁만이 조선 독립의 유일한 전통은 아니며 [[만주]] 외에도 여러 곳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했다고 주장했다.<ref name="gang142"/>
 
==== 8월 종파사건과 숙청 ====
{{참고|8월 종파사건}}
그러나 이미 '[[주체]]를 세우자'는 깃발을 든 [[김일성]]은 이들을 집중 공략했다.<ref name="gang142"/> [[김일성]]은 이미 6.25 전쟁 과정을 통해 북조선의 군권을 거의 장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이끈 빨치산파를 '군부파'라고도 불렀다. 이들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소련파와 연안파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ref name="gang142"/> 결국 소련파의 [[박창옥]]과 연안파 최창익의 [[김일성]]에 대한 정면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연안파들은 중국으로, 소련파들은 소련으로 흩어지고 말았다.<ref name="gang142"/>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터지자 연안파 세력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하며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박헌영]] 일파가 제거되자마자 그는 서열에서 밀려났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이 터지자 연안파 세력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하며 [[김일성]]일파를 공격하려다 실패하면서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을 공격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박헌영]] 일파가 제거되자마자 소련파의 [[김일성]] 비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연안파에 대해 공격이 가해졌고, 그해 [[김일성]]의 일인 독재를 비난한 것이 문제되어 공개비판을 당한 뒤 그는 서열에서 밀려났다.
한편 그가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의 처 [[허정숙]]은 그가 반당 종파행위에 가담했다며 그에게 불리하게 증언하였다. 그러나 아내와의 관계는 이미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재판에 임하였다. [[1957년]] [[9월 1일]] 숙청당한 뒤 수감당하였고, 감옥에서 수감중 옥사하였다.
 
그뒤 최창익은 ML파를 옹호한 사실과, '항일무장투쟁 세력이 국외에서 항일을 하였다면 ML파 등은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다'고 하여<ref name="leeso233">한국역사연구회, 북한의 역사 만들기 (푸른역사, 2003) 233페이지</ref> 국외와 국내를 분리하고 어려운 항일무장투쟁에 국내의 운동을 "동격"에 놓고자 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비판을 받았다.<ref>한국역사연구회, 북한의 역사 만들기 (푸른역사, 2003) 234페이지</ref>
 
=== 최후 ===
한편 그가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 그의 처 [[허정숙]]은 그가 반당 종파행위에 가담했다며 그에게 불리하게 증언하였다. 그러나 아내와의 관계는 이미 악화된 상태였으므로 동요하지 않고 태연히 재판에 임하였다. [[1957년]] [[9월 1일]] 숙청당한 뒤 수감당하였고, 감옥에서 수감중 옥사하였다.
 
이후 그는 같은 연안파인 [[김두봉]], 장안파 계열인 [[최익한]] 등과 함께 반당종파행위란 죄목으로 [[1957년]] [[9월 1일]] 제명과 동시에 숙청당한 뒤 [[평양]] 감옥에 수감당하였다. [[1957년]] 감옥에서 [[평양]] 수감중 옥사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61세였다.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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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와 비판 ==
{{부분토막글}}
 
북한의 작가 [[천세봉]]의 조선의 봄에서는 그는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ref name="sangheo"/>
 
동시대를 살던 [[북한]]의 역사학자 [[이청원]](李淸源)은 그를 소부르주아라 비판하였다.<ref name="leeso233">한국역사연구회, 북한의 역사 만들기 (푸른역사, 2003) 233페이지</ref> 그에 의하면 "[[맑스 레닌주의]]의 전략, 전술을 조선 혁명 운동에 실지로 정확하게 적용하지 못했으며 민족해방운동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정치적, 조직적으로 실현할 만큼 그런 진실한 [[공산주의]]자로 되지 못했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ML파 출신이자 연안파의 일원이기도 했던 최창익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볼수 있다.<ref name="leeso233"/>
 
== 기타 ==
[[북한]]의 역사학자 석윤기는 자신의 소설 [[봄우뢰]]에서 그가 '안영호의 애인을 빼앗아 도피한 후 그녀를 버려 죽음에 이르게 했다.<ref name="sangheo"/>'는 내용을 언급하였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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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지연, 최창익 연구 (백산서당, 2009)
* 이현주, 한국독립운동의역사 47:1920년대 재중항일세력의 통일운동(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이철,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모던걸과 모던보이를 매혹시킨 치명적인 스캔들 (다산초당, 2008)
</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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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공산주의자]]
[[분류:사회주의자]]
[[분류:반전체주의자]]
[[분류:군정기]]
[[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