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섭 (언론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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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0월 8일 《중외일보》에 〈세계 일주 기행 - 조선에서 조선으로〉를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1928년]] [[2월 27일]] 《중외일보》에 실린 [[아일랜드]] 기행문 필화 사건(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이정섭이 쓴 아일랜드 기행문이 독립운동을 고취했다며 문제삼았음)에 연루되어 중외일보 주필 [[이상협 (1893년)|이상협]]과 함께 보안법 및 신문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1928년 3월 1일 연재가 중단되고 만다.<ref name="신문과 방송"></ref> 1928년 4월 4일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1928년 11월 2일 경성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32년]] [[조선일보]] 정치부장으로 임명되었고 [[1933년]] [[11월 6일]] [[시중회]] 간사로 선임되었다. [[1938년]] 2월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과 가진 회견에서 [[일본 제국의제국]]의 [[내선일체]] 방법론 가운데 하나로 이른바 민중단일당 건설을 제안했는데 그가 구상한 민중단일당은 군(軍), 관(官), 민의민(民)의 합작으로 설립되어 이들을 일체로 만들고 조선을 총지배하는 단일 조직이었다. 이 회견은 1938년 5월에 발행된 잡지 《[[삼천리 (일제 강점기의 잡지)|삼천리]]》에 〈총독회견기(總督會見記)〉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1938년 5월 2일 [[경성방송국|경성중앙방송국]] 방송부 제2방송과 직원으로 입사했다.
 
[[1939년]] 《재만조선인통신》에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논설을 기고했고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삼국 동맹 조약]] 체결과 [[태평양 전쟁]],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하는 논설을 기고했다. [[1941년]] 11월 조선방송협회 제2방송부 보도과장과 기획과장으로 선임되었다. 1941년 9월 7일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 명치정대에 참가했으며 [[1941년]] [[10월 22일]]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1945년]] [[6월 9일]]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으로 각각 선임되었다. [[1945년]] [[6월 14일]] 조선언론보국회 주최로 열린 언론총진격대회 연사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