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그라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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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법안이 차례로 제출됨에 따라 가이우스는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로마 민중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전통적인 보수파들에게 법안의 일부는 매우 불쾌한 것으로 특히 시민권의 확대는 모든 [[원로원]] 의원이 가이우스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두번째 호민관 시기==
기원전 122년 두번째로 호민관에 당선된 가이우스는 더욱 정력적으로 개혁을 실현하려 했고 반대파의 반대도 점점 노골적으로 되어갔다. 가이우스는 카르타고를 재건하여 식민도시를 건설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를 위해 카르타고에 나가 있는 동안 원로원은 리비우스 드루수스라는 다름 호민관을 이용해 더 급진적인 법안을 제출하게 함으로 가이우스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가이우스는 초조해 졌다. 다음해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두사람중의 한사람은 [[루키우스 오피무스]]로 매우 강력한 그라쿠스의 반대자였기 때문에 그동안 쌓아왔던 개혁이 물거품이 될 우려가 있었다. 이어 벌어진 호민관 선거에서 가이우스는 결국 세번째 연임에 실패하였고 노력을 기울였던 카르타고 식민 도시 건설마저 반대파가 무혀법안을 제출한 상태였다.
 
==죽음과 그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