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 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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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 문화(飛鳥文化)는 7세기 전반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시기에 아스카(飛鳥) 지역에서 발달한 문화이다. 일본 최초의 [[불교]] 문화인데, [[백제]]로부터 불교를 수용한 결과였다. 백제에서 보낸 조사공(造寺工), 불공(佛工), 와공(瓦工), 노반공(露盤工) 및 화공(畵工)의 손에 의해 일본의 사찰들이 창건되었다. <ref>{{서적 인용 |제목= 유물의 재발견 | 저자= 남천우 |꺾쇠표 =예|연도= 1997 |출판사=학고재 |쪽=374 |id=ISBN 8985846302 |인용문= 일본의 소위 아스카 문화는 6세기 말엽에 백제로부터 전래된 불교문화이며 초기의 일본 사찰들이 백제에서 보낸 조사공(造寺工), 불공(佛工), 와공(瓦工), 노반공(露盤工) 및 화공(畵工)의 손에 의해 직접 창건되었다는 것...은 모두 기록에서도 보는 바이다.}} </ref> [[유교]]와 [[도교]] 등 외래 학문과 사상이 다양하게 나타나 국제성이 풍부한 것이 특징이다. 백제 유학자 [[왕인]]은 아스카 문화를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ref>송신용.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120217 백제가 꽃피운 또 하나의 대역사 ‘일본 아스카 문화’]. 대전일보. 2007년 10월 12일.</ref> <ref>조명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4042245215&code=950312 영암 왕인문화축제 6일 개막… 문화행사 풍성]. 경향신문. 2012년 4월 4일.</ref> [[소가노 우마코]]의 주도하에,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은 사찰, [[호코지]]를 지었다. <ref>{{서적 인용 |저자=허인순 등 |제목=이미지로 읽는 일본문화 |꺾쇠표= 예 |연도= 2009 |출판사=어문학사 |위치=|id=ISBN 9788961840927 |쪽= 128 |인용문 = 596년에 나라에 세워진 아스카데라飛鳥寺는 일본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소가노 우마코가 후원하여 백제의 승려와 장인들이 지었다. }} </ref> 고구려의 승려 [[혜자]]와 백제의 승려 [[혜총]]은 [[호코지]]에 살면서 포교하였다. <ref >{{서적 인용 |제목=[[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장=[[: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ㅎ/혜자|혜자]] |연도= 2004|출판사=도서출판 범한 |인용문=惠慈(?-622) 고구려 말기의 승려. ....백제의 승려 혜총과 함께 596년 호코사(법흥사)가 세워지자 그 곳에 살면서 포교하였다.}}</ref> 이들은 본국인 백제와 고구려에서 많은 승려를 불러오는 한편, 많은 도서를 수입하여 일본의 문화 건설에 이바지했다. <ref> {{서적 인용 |저자= 이은직 |기타= 정홍준 역 |제목= 조선명인전 |꺾쇠표= 예 |연도= 2005 |출판사= 일빛|id=ISBN 8956450889|쪽= 29 |인용문= 596년에 장대한 호코지가 낙성되자 혜자와 혜총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겨 본국인 백제와 고구려에서 많은 승려를 불러오는 한편, 많은 도서를 수입하여 일본의 문화 건설에 이바지했다. }} </ref>[[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을 진상하고 강독한 것은 [[혜자]]이며, 불상과 불각(佛閣) 등을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은 [[혜총]] 대사이다. 그리고 [[호류지]]의 그 유명한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ref>{{서적 인용 |저자=김윤식 |제목=일제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꺾쇠표= 예 |연도= 2003 |출판사=서울대학교출판부 |위치=|id=ISBN 8952104676 |쪽= 378|인용문 = 쇼토쿠 태자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진상하고 강독한 것은 고구려 승려 혜자 대사이며, 불상과 불각(佛閣, 불당 ― 역자) 등을 만드는 역할을 한 것은 백제 승려 혜총 대사이다. 그리고 호류지의 그 유명한 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린 것으로 되어 있다. }} </ref>
 
== 대외 관계 ==
=== 신라와의 관계 ===
====대립과 갈등 (7세기 초중반)====
[[649년]]에는 신라에서 김다수(金多遂)가 왜국에 파견되는 등 왜에 대한 외교 공작도 활발해졌다. 645년에 왜에서 [[나카노오에 황자]](훗날 [[덴지 천황]])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자, 급진 개혁 세력은 당과 그 동맹국 신라를 자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개혁 모델로 삼아 [[다이카 개신]]이라는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신라와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당시 신라의 실력자였던 김춘추도 직접 왜로 건너가 왜 조정과 교섭하면서, 왜의 귀족들에게 "용모가 아름답고 말이 시원시원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647년)<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꺾쇠표 =예|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五|卷第廿五 孝德天皇]] |인용문=三年...冬十月...新羅遣上臣大阿飡金春秋等、送博士小德高向黑麻呂・小山中中臣連押熊、來獻孔雀一隻・鸚鵡一隻。仍以春秋爲質。春秋美姿顏善談笑。<!--번역: 3년 겨울 10월, 신라는 고위급 관리인 대아찬 김춘추 등을 보냈다. 박사 小德高向黑麻呂・小山中中臣連押熊를 보내 공작 한쌍과 앵무새 한쌍을 바쳤다. 김춘추는 인질이 되었다. 김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 하였다.-->}}</ref> 백제를 없애기 위해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이었던 왜를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신라로서는 중요한 문제였다.<ref>{{뉴스 인용 |저자 = [[박노자]] |제목 =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url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45.html |출판사 = 한겨레21 제764호 |작성일자 = 2009-6-12 |인용문 = 또 645년에 쿠데타로 집권한 급진개혁 세력은 당나라와 당나라의 동맹국인 신라를 중앙집권화 지향의 개혁 모델로 삼아 신라 지배자들과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대일 관계라면 일단 소홀히 다루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지만, <일본서기>(고토쿠 천황 3년)에 따르면 647년에 신라의 실세인 김춘추(602∼661)가 직접 도일해 일본 귀족들에게 ‘아름답고 쾌활하다’는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백제를 없애려는 김춘추·김유신 일파로서는 백제의 오랜 동맹국인 왜국을 백제로부터 떼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ref> 하지만 백제와 왜를 갈라놓으려는 신라의 외교는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체로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왜의 유수의 호족 소가(蘇我) 일족과 긴밀한 통혼 관계에 있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는 등의 왜의 내부 사정으로 친백제 경향이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진 데에 있다는 지적이 있다.<ref>{{뉴스 인용 |저자 = [[박노자]] |제목 =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url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45.html |출판사 = 한겨레21 제764호 |작성일자 = 2009-6-12 |인용문 = 백제를 고립시키려는 신라의 적극적인 대왜 외교가 결국 실패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본적으로는 왜국의 내부 사정이 크게 작용했다. 백제 계통으로 추정되는 유수의 호족인 소가(蘇我)씨와 긴밀한 통혼 관계를 가진, 그리고 나중에 덴지(天智·재위 661∼672) 천황 으로 등극된 나가노 오에(中大兄·626∼672) 황자가 649년부터 왜국의 실권을 잡게 되어 친백제 경향은 친신라 경향보다 훨씬 우세해졌다.}}</ref> 이 무렵 왜 조정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당이 왜와는 비교적 사이가 소원했던 고구려가 아닌 전통적인 우호국 백제를 바다 쪽에서 공격할 가능성이 타진되면서 왜는 전통적인 우호 관계였던 중국 왕조(당)와 한반도의 왕조(백제) 사이에 양자택일을 강요당해야 했던 것은 분명하다.<ref>이 시기 왜의 외교 정책에 대해서는 일관적으로 친백제 노선을 견지했다는 설과, 고토쿠 천황 중심의 친백제파와 나카노오에 황자 중심의 친신라(친당)파로 나뉘어 있었다는 설, 거꾸로 고토쿠 천황이 친신라(친당)파였고 나카노오에 황자가 친백제파였다는 등 역사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 나라의 경우 이재석은 고토쿠 천황의 지휘 아래 이루어져 온 친신라(친당) 정책이 당의 백제 공격 결정에 의해 파탄나고, 친백제파였던 나카노오에가 아스카 천도를 단행하면서 고립된 고토쿠 천황을 실각시켰다는 견해를 주창하고 있다.</ref> 또한 신라의 급속한 당풍화가 왜에 불안을 가져왔다는 지적도 있다. [[하쿠치|하쿠치(白雉)]] 2년([[651년]])에 신라에서 왜에 파견한 사찬 지만(知萬)이 당의 관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이를 '불쾌하게' 여긴 왜의 [[좌대신]] 코세노 토쿠타(巨勢徳陀子)가 왜의 실질적인 실력자였던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 후의 [[덴지 천황]])에게 신라 정벌을 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ref>{{서적 인용 |제목= [[일본서기]] | 저자= |꺾쇠표 =예|연도= 720 |장= [[:s:zh:日本書紀/卷第廿五|卷第廿五 孝德天皇]] |인용문=二年春三月...是歲、新羅貢調使知萬沙飡等、着唐國服、泊于筑紫。朝庭惡恣移俗、訶嘖追還。于時、巨勢大臣、奏請之曰、方今不伐新羅、於後必當有悔。其伐之狀、不須舉力。}}</ref> <ref>{{뉴스 인용 |저자 = [[박노자]] |제목 =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url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45.html |출판사 = 한겨레21 제764호 |작성일자 = 2009-6-12 |인용문 = 나가노 오에 뒤에 있는 소가씨 등의 호족들에게 백제란 ‘우리 조상의 땅’이었을 것이란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거기에다 신라와 당나라의 너무나 빠른 ‘친해지기’는 왜국 지배자들에게 불안을 심어주었다. 649∼651년에 당나라 관복 제도와 궁중의례 등을 빨리 받아들인 신라의 사절인 사찬 지만(知萬)이 651년 왜국에 오자(<일본서기> 고토쿠 천황 백치 2년) 왜국 지배자들이 이를 불쾌하게 여겨 ‘신라 침공’까지 들먹였다. }}</ref>
====백강 전투와 왜의 접근 (7세기 후반) ====
660년에 나ㆍ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본의 동맹국인 [[백제]]의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어 백제는 멸망하였다. 이 와중에 백제의 옛 장수였던 [[귀실복신]]ㆍ[[흑치상지]] 등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신라ㆍ당과의 대립을 무릅쓰고 백제 부흥 운동을 지원하였다. 663년, 신라와 당은 수륙협공으로 백제 부흥정부의 수도 주류성으로 진격했다. 이때 육지에서는 백제의 기병이 진을 치고 신라군과 맞섰고, 바다에서는 왜에서 온 함선들이 강변의 모래밭에 정박해 있었다. 왜병 선단은 전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했지만 전술 및 간조의 시간차로 인해 당군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네 번 모두 대패했다.(이때 백제ㆍ왜의 연합군은 당의 수군에 밀려 물러나 있다가 "우리가 먼저 치면 저들은 알아서 물러날 것"이라는 몹시 엉터리같은 작전을 택했다고 한다.) 백강에 집결해 있던 1천 척의 함선 가운데 4백 척이 불탔으며, 신ㆍ구《당서》와 《자치통감》, 그리고 이들 사료를 참조한 《삼국사기》는 이때의 싸움을 두고 "연기와 불꽃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바닷물마저 핏빛이 되었다"고 당시의 처절했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백강 전투]])
 
왜는 백제의 멸망으로 대거 유입된 난민들을 수용하는 동시에 신라나 당과의 대립은 깊어졌다. 그러나 또한 한반도의 새로운 패권 세력인 신라와 친해지지 않으면 신라와 당의 연합이 왜국을 크게 위협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왜는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고, 왜의 중신이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나서서 신라의 문무왕과 함께 신라 조정의 실력자였던 [[태대각간]]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과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이는 훗날, [[원효|원효(元曉)]]나 [[의상 (신라)|의상(義湘)]] 등의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신라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ㆍ외교사적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진다.<ref>{{뉴스 인용 |저자 = [[박노자]] |제목 = 구원병 자격으로 한반도를 찾았던 왜군 |url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145.html |출판사 = 한겨레21 제764호 |작성일자 = 2009-6-12 |인용문 = 그리하여 백제 부흥운동 세력들이 완전히 패배하자 왜국은 서둘러 665년부터 신라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그 뒤로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에게 ‘선물 공세’를 취하는 등 8세기 초까지 당나라와는 거의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도 신라와의 교류에는 적극적이었다. 원효와 같은 신라 승려들이 나중에 본국보다 일본에서 더 유명해질 수 있는 정치•외교사적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 }}</ref>
==부록==
=== 주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