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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역시 [[진호국가]](鎮護国家)의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쇼무 천황]]은 [[도다이지]](東大寺)를 조영하고, 전국 각지에 고쿠분지를 세워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여 불교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외 관계==
===신라와의 관계===
이 시기에 신라와 왜는 긴밀하게 통교하였다.<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꺾쇠표 = 예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55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 = 대외적으로는 신라·당과의 통교를 긴밀하게 하는 한편, ...}} </ref> 통일 신라와 일본의 무역은 일본의 사절단을 통한 공무역과 상인들에 의한 사무역이 이루어졌는데, 사절단의 공무역은 대당무역에 비해 빈번하지 않았다. 사절단 일행은 최대 수백명에 이르렀는데, 그들 중에는 다수의 상인도 포함되어 이들에 의한 사무역이 주로 이루어졌다. 공무역은 주로 사절단이 건너 와서 예물을 바치면 후대해서 보내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사절단이 무례한 행위를 할 경우 접견을 거부하고 돌려 보내기도 하였다. [[쇼소인]]에 남아 있는 보물을 통해, 신라와 [[나라 시대]]의 일본이 활발히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관된 보물 중에는 신라의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이 있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 <ref>{{서적 인용 | 저자 = 연민수 |제목= 일본역사 |꺾쇠표 = 예 |출판사=보고사 |연도=1998 |쪽=61 |id = ISBN 89-86142-81-3 |인용문 = 정창원 … 특히 신라와 일본의 교류가 활발해 신라의 물건이 많이 남아 있다. 신라의 예를 들면 공방에서 만든 생활용품 ·공예품·문방사구 등 다양하다. 구체적인 물품의 종류는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라는 문서에 보이고 있는데, 이 문서는 일본에 들어 온 신라물건을 사기 위해 일본의 관인·귀족들이 물품의 종류와 가격을 적어 관청에 올린 문서이다. 여기에 나타난 물건의 종류를 보면 각종 금속공예·기물·모직가죽제품·불교관계의 물건·약물·향료·염료 등 다양하다. }}</ref>
 
일본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소 소략해 일본 쪽 자료를 보충하지 않을 수 없지만, 양쪽 자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한 세기 동안 신라 사신들이 일본에 39차례나 파견됐다. 같은 기간에 일본 사신들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그 기간에 당나라로 견당사(遣唐使)를 보낸 것은 불과 10차례였다. <ref>{{뉴스 인용|제목=<nowiki>[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nowiki> 통일신라-일본의 친교는 왜 잊혀졌나 |url=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431.html |출판사=한겨레신문사 |작품명=한겨레21 |저자=[[박노자]] |작성일자=2009-07-24 |확인일자=2009-07-27}}</ref>
== 주석 ==
{{reflist|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