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빈 홍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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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현감을 지내고 훗날 이조참판에 추증된 [[홍여겸]](洪汝謙)의 딸로,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이다<ref name="gc">[http://www.rfo.co.kr/html/pachong_view.php?mode3=history&No=91 전주이씨대동종약원 - 경창군 약사]</ref>.
 
[[1580년]](선조 13년) [[음력 5월 26일]] [[민사준]](閔士俊)의 딸(훗날의 [[정빈 민씨]]), [[정순희]](鄭純禧)의 딸 등과 함께 종2품 [[내명부|숙의]](淑儀)에 책봉되어 봉상시동(奉常寺洞,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당주동]] 일대<ref>[http://doopedia.co.kr/m/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85215 두피디아 -〈당주동〉항목]</ref>)에 있는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ref>《조선왕조실록》선조 14권, 13년(1580 경진 / 명 만력(萬曆) 8년) 5월 26일(갑오) 1번째기사</ref><ref>《조선왕조실록》선조 14권, 13년(1580 경진 / 명 만력(萬曆) 8년) 5월 26일(갑오) 2번째기사</ref>. 이후 언제 승급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년)의 기사에서 이미 그녀를 정빈(貞嬪)으로 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그 이전에 정1품 [[내명부|빈]](嬪)에 책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그녀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피난을 가야 했는데, [[음력 5월 8일]]부터 그녀를 비롯한 [[조선 선조|선조]]의 [[후궁]]들에게 하루 세 끼가 지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f>《조선왕조실록》선조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8일(정묘) 8번째기사</ref>. 이후 [[1596년]](선조 29년) 아들 [[경창군]](慶昌君)을 낳았다<ref name="gc"></ref>.
 
그러나 홍씨는 [[조선 인조|인조]](仁祖) 연간에 발발한 [[정묘호란]]으로 인해 또 피난을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홍씨는 제천(堤川, 지금의 [[충청북도]] [[제천시]])에 있었는데, 인조는 홍씨 등<ref>역시 [[조선 선조|선조]]의 [[후궁]]이던 [[온빈 한씨]](溫嬪 韓氏)도 [[양주시|양주]](楊州)로 피난을 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인조 15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2월 28일(을축) 6번째기사 참고</ref>에게 해당 고을에서 음식 등에 각별히 신경쓰도록 명을 내리기도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인조 15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2월 28일(을축) 6번째기사</ref>.